지난 11월 6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센터에서 대선 승리 연설 무대에 올라 지지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11월 5일(현지시간) 열린 미국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서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승리하고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여기에 승복하는 것. 둘, 트럼프가 승리하고 해리스가 승복하는 것. 셋, 해리스가 승리했지만 트럼프가 갖은 이유로 불복하며 법정으로 선거를 끌고 가고 트럼프 지지자들이 격하게 항의하는 것.

그 어느 때보다 초접전으로 예상됐고 이미 의회 난동이라는 사건이 있었던 탓에 세 번째 시나리오를 점치는 언론들이 많았지만 결과는 두 번째로 싱겁게 마무리됐다. ‘붉은 신기루(red mirage·공화당 후보가 앞서는 것처럼 보이다가 사전투표로 뒤집히는 현상)’를 기대했을 법한 해리스 측은 꽤나 일찍 패배 선언을 해야 했다.

2016년도 그랬고 2020년도 그랬으며 이번 미국 대선도 그랬다. 선거의 화두는 “트럼프냐 트럼프가 아니냐”였다. 여기에 답하려는 수많은 인원들이 투표장으로 향했다. 이번 대선 투표율은 66%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120년 만의 최고 투표율이었던 2020년 대선과 비등한 수치다.

한때 트럼프는 시대가 낳은 이단아로 취급됐지만 그의 자취는 ‘트럼피즘’이라는 이름으로 깊게 각인됐다. 영어 관용어 중에 ‘800파운드 고릴라’라는 단어가 있다. 절대적 힘을 가진 매우 위험한 존재를 뜻한다.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미트 롬니 상원의원은 트럼프를 두고 ‘900파운드 고릴라’라고 부른 적이 있다. 100파운드를 더 얹힐 정도로 그가 가진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뜻이었다.

미국 우선주의 후보, 공화당원이 원해

퇴장하면 흔적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그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2020년 이후에도 트럼프의 잔흔은 미국 정치권에 큰 영향을 줬다. 일단 ‘트럼프 키즈’가 공화당을 뒤흔들었다. 바이든 정부는 포장을 달리 했을 뿐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트럼프라는 정치인, 그리고 트럼피즘이라는 그의 이념은 다가올 ‘트럼프 2.0’ 시대까지 합치면 십수년간 세계에 영향을 주는 커다란 흐름처럼 변모했다.

부도덕한 사생활은 뒤로 미루더라도 각종 범법 행위로 재판을 받고 있고 비판자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상대 후보에게 인신공격을 퍼붓는 정치인이 트럼프다. 자신과 척을 진 자에게 복수까지 다짐하는 후보를 미국은 왜 또다시 리더로 선택했을까. 과거 젭 부시 전 플로리다주지사 캠프에서 일하고 트럼프의 초기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캠페인을 설계했던 팀 밀러는 2022년 ‘우리가 왜 그랬을까’라는 책을 통해 공화당이 트럼프에게 잠식되는 과정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풀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는 지난 9월 미국 시사지 ‘디애틀랜틱’이 주최한 콘퍼런스에 참가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화당 유권자들이 스스로 ‘미국 우선주의’ 후보를 원한다. 그들은 결국 가장 반사회적인 사람을 후보로 결정했다.”

보통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뒤 공화당이 ‘트럼프화’됐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반면 트럼프가 아닌 공화당의 변화가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에즈라 클라인은 미 정계에서 영향력이 큰 스피커다. 그는 저서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에서 트럼프가 공화당에 처음 등장했을 무렵, 그를 주목했던 유명 정치칼럼니스트 놈 오른스타인의 분석에 주목했다. 오른스타인은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 거라는 말이 터무니없게 들리던 2015년 8월, ‘디애틀랜틱’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나는 기성 권력층이 티파티(미국의 강경 보수 단체) 급진주의자들을 포섭하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그 기성 권력층 대부분이 오히려 포섭당하거나 그들 때문에 주눅이 든 공화당 의회를 보았다. 정당이 변하자 워싱턴 외곽의 당 활동도 변했다. 주 의회, 주 정당기구, 주 정당강령에 가장 극단적인 의원들이 온화하게 보일 정도의 성명이나 입장이 들어갔다.”

지난 10월 27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에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photo 뉴시스

대립과 분열, 공화당의 흐름이 바뀌었다

당시 평론가들은 트럼프라는 존재를 공화당과 이질적인 존재로 봤다.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같은 보수 온건주의자를 공화당의 대표 얼굴로 여겼다. 반면 오른스타인 등 소수의 관찰자들은 공화당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지만 극단적 보수주의자를 중심으로 대립과 분열의 방식이 당내에서 관통하는 것을 잡아냈다. 그리고 이 흐름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 트럼프라고 봤다. 오른스타인은 “그의 입후보, 그리고 승리는 공화당이 과격해지는 순환고리에 빠져들게 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었다.

공화당은 보수라지만 트럼프에 찬성하는 이들은 딱히 이념적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다. 미 브리검영대학교 교수인 마이클 바버와 제러미 포프는 트럼프주의자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그들은 트럼프주의자를 트럼프 관련 정보를 배제한 집단, 트럼프가 진보적 입장을 표명한 정책을 접하는 집단, 트럼프가 보수적 입장을 표명한 정책을 접하는 집단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후 반응을 추적했는데 강한 보수주의자들이 트럼프에 보다 열렬하게 호응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트럼프가 진보적 입장을 보이든 보수적 입장을 보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그들의 방향을 정하는 건 이념적 방향이 아니라 트럼프의 방향이었다.

트럼피즘에 반대했던 저스틴 어마시 전 하원의원이 공화당을 탈당했을 때 트럼프는 “공화당에 좋은 소식이다”라는 트윗을 올렸다. 자신을 보수적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어마시는 당내에서 트럼프 비판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인터넷매체 ‘복스(Vox)’와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아니라 공화당이 변했다”고 말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많은 공화당원들은 좌파에 맞서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큰 정부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트위터에서 과잉지출이나 큰 정부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정부가 얼마나 큰지 누가 신경이나 쓰냐’ ‘우리가 불법 이민과 좌파에 맞서 싸우려면 얼마나 많은 지출이 필요한지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는 반응을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도 트럼프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은 이런 문구가 적힌 셔츠를 입었다. ‘나는 유죄 판결을 받은 중범죄자에게 투표한다.’

이들에게 트럼프는 강력한 지도자다. 갤럽이 지난 9월 16일부터 28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도덕성·신뢰도 등에서는 해리스에게 뒤졌지만 리더십만은 우위를 점했다. 갤럽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이며 일을 완수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해리스를 앞선다”고 평가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 좋은 판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 비율이 4년 전보다 6%포인트나 상승한 52%를 기록했다.

‘내가 바꿀 것이다’, 강한 리더십의 승리

스티브 피시 버클리대 교수는 지난 5월 펴낸 ‘컴백(COMEBACK)’이라는 저서에서 “트럼프는 정치적 소통에서 지배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해 의제를 설정한다. 이는 합의 지향적이고 소극적인 민주당을 일관되게 약하게 보이도록 하고 수세에 몰리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럼프의 ‘지배력 게임’이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라고 본다. 여론조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지배적 스타일이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하는 사람들로부터 강한 팬심을 끌어낸다고 봤다. “트럼프는 공포 유발 전략으로 유권자들을 자극한다. 그런 뒤 자기 연민과 자신의 분노에 관해 이야기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가 다른 정치인들과 진정 차별화되는 부분은 추종자들에게 ‘내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는 부분이다. 극도의 지배적 스타일을 갖고 있다.” 이런 그의 스타일은 이번 대선에서도 줄곧 관찰된다. 트럼프는 여러 차례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강한 리더십과 해리스의 약한 리더십을 대비시키는 장면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트럼프에 매료돼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올린 주 계층은 보수 성향의 백인 중산층과 쇠락한 전통 제조업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누군가가 현재의 문제를 바로잡아주길 갈망하는 취약한 계층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그들이 분노를 터트릴 대상으로 ‘좌파’와 ‘불법이민자’ 등을 지정했고 이들을 위로해주는 명목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했다.

극도로 양극화된 미국 사회도 트럼피즘을 강화시키는 요소다. ‘아메리칸 엔드 게임’이라는 책을 써내며 미국 사회의 민낯을 연구한 김광기 경북대 교수는 “미국의 지형적 갈등 양상과 지형이 보다 복잡하다”고 지적한다. 같은 주 안에서도 농촌과 도시 지역 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정서가 팽배하다는 것이다. 같은 도시 내에서도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김 교수는 “대체로 그런 분열이 정치색과 맞물리는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도시와 농촌 간 분열을 보면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존재했는데 최근에는 그 강도가 더 세며 정치적으로도 훨씬 더 강한 동조화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시골과 도시의 갈라치기도 먹혔다

일자리 부족이나 빈곤율 등으로 고통받는 미국의 시골은 아이러니하게도 복지를 축소하고 경쟁을 강조하는 공화당을 지지한다. 트럼프 측은 열악한 미국 농촌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능숙하다. 미 언론에서 ‘반(反)도시 전략’이라고 부르며 비판할 정도다. 도시의 엘리트들을 ‘시골을 무시하며 잘난척이나 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시골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한다”며 시골의 열등감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동안 무시받았던 시골 백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자신뿐이었다고 강조한다. 이런 갈라치기 전략은 꽤 유효했다.

이번 대선에서 스윙스테이트(격전지) 7개 주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곳은 펜실베이니아주다. 4년 전 이곳에서 패배했던 트럼프가 이번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히는 게 시골 카운티에서의 선전이다. 대도시인 필라델피아, 피츠버그에서는 해리스가 승리했지만 유권자가 적은 시골 카운티는 트럼프가 싹쓸이했다. 70% 이상 득표한 곳도 많았고 일부 카운티에서는 80%가 넘는 몰표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는 해리스의 패인으로 “트럼프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춘 선거운동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이는 거꾸로 해리스 자신이 왜 바이든과 다른지, 왜 새로운 리더십인지를 설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투표가 끝나고 발표된 출구조사에서는 72%가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이든 정부에 대해 유권자의 7%만이 ‘매우 만족’, 19%가 ‘만족’이라고 답했다. 반면 43%는 ‘불만족’ 29%는 ‘분노’라고 밝혔다. 출구조사 데이터를 본 크리스 월리스 CNN 앵커는 “이 수치를 감안할 때 해리스가 승리하려면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젊은층마저도 해리스에게 등 돌린 행렬이 적지 않았다. 30대 미만 유권자 중 해리스 지지자는 50%였는데 4년 전 바이든은 60%였다.

이탈한 젊은층을 트럼프 쪽으로 끌어오는 걸 도운 이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다. “회사를 대선에 베팅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트럼프에 올인한 머스크는 트럼프를 위한 슈퍼팩(super PAC·정치자금 모금 단체)인 ‘아메리카팩’을 직접 설립해 운영했다. 지원한 선거자금만 해도 약 1억3200만달러(약 1840억원)에 달했다. 그는 주요 소셜플랫폼 중 하나인 X(옛 트위터)의 소유주이자 그 스스로가 X에서 2억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11월 5일 선거일 아침 머스크는 X에서 자유토론 형식으로 선거에 관한 라이브방송을 1시간30분가량 진행했는데 실시간 시청자 수가 약 130만명이었다. 그는 이런 라이브 토론을 선거 기간 중 여러 차례 진행했다. 그중에는 트럼프와 함께하는 경우도 있었다.

머스크는 레거시 미디어 대신 뉴미디어를 선거에 적극 활용했다. 코미디언 조 로건의 팟캐스트(조 로건 익스피리언스)에 열심히 출연한 게 대표적이다. 로건의 팟캐스트 출연은 인구통계학적으로 계획된 선거 캠페인 방법이었다. ‘조 로건 익스피리언스’의 유튜브 구독자는 1830만명이나 된다. 이 중 남성이 약 80%, 18~34세 비율이 51%다. 젊은층에 어필하기에는 이만한 채널이 없다. 트럼프는 승리 연설에서 5분 이상을 머스크 칭찬에 할애할 정도로 그를 찬양했다.

바이든의 ‘규제’보다 트럼프 택한 기업들

이번 선거를 앞두고 기술기업 관계자들 중 트럼프 지지를 밝힌 이들이 꽤 된다. 민주당과 가깝던 그간의 전통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2021년 미 의사당 폭동 이후 트럼프와 거리를 두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기술기업 리더들의 합류는 트럼프를 보다 합리적인 사람으로 포장하는 데 일조했다.

미국 벤처투자 전문기업인 ‘앤드리슨 호로위츠’의 공동 창업자인 벤 호로위츠는 기고문 등을 통해 “바이든 정부의 그릇된 정책이 리틀테크(이제 막 시작한 테크 스타트업)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며 “업계가 일어설 때가 왔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2017년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트럼프 정부의 자문기구인 ‘비즈니스 카운슬’을 탈퇴했던 전력이 있다. 그랬던 그가 민주당이 아닌 트럼피즘을 선택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바이든 정부의 규제보다 트럼프가 낫다고 본다. 머스크도 자율주행 차량의 현실화 등 여러 부문에서 바이든 정부의 규제와 충돌했던 전력이 있다.

기술업계에 ‘미국 우선주의’라는 트럼피즘의 방향이 먹힌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가렛 존슨 미국 혁신재단 설립자는 더 많은 기술업계 관계자들이 트럼프의 견해에 동조하는 흐름이 있을 거라고 본다. 그는 B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중국이 미국에 가하는 위협을 국가적 화두로 끌어올린 사람이 트럼프”라며 “기술업계 리더들이 트럼프에 동조해 가는 것도 역동적인 변화의 일부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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