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동의 대표적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국교 수립을 중재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최근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 확장이 두드러지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전의 카드로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중재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NYT에 따르면, 지난 6~7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던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사우디 출국 직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위한 사우디의 구체적 요구 사항을 전했다. 이날 블링컨과 네타냐후의 통화는 40분 가까이 이뤄졌으며, 사우디가 이스라엘에 수교 대가로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상을 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전달됐다. 또 사우디는 민간 분야의 원자력 개발을 위한 우라늄 농축 허용 등의 조건을 블링컨을 통해 바이든 행정부에 전했다. 이는 미 의회 승인 사안이고, 미 정부 관계자들은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수교 확률을 50% 이하로 보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중재에 나선 것은 중국의 중동 내 세력 확장으로 영향력이 축소되는 미국의 다급함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약 2주 전 사우디를 찾아간 블링컨은 18일에는 중국을 방문했다.
실제로 최근 중동 곳곳에서 미국 영향력 축소 움직임은 감지되고 있다. 지난 5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프린스 술탄 대학교에서 사우디 1호 공자학원(孔子學院)이 문을 열었다. 미국은 공자학원에 대해 “중국어·문화 교육이 본래 목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 선동과 재외 자국민 감시, 대외 정보 수집 조직”이라며 동맹들에 퇴출을 독려해 왔다. 사우디가 공자학원을 연 것은 이런 미국의 입장과는 반대된다.
미국의 중동 내 핵심 군사 파트너 아랍에미리트(UAE)도 지난달 미 해군 산하 다국적 부대인 연합해사군(CMF) 탈퇴를 선언했다. CMF는 걸프 및 홍해 지역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해적 활동을 격퇴하기 위해 한국·일본·호주·사우디·독일·필리핀 등 34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보다 미국에 타격을 준 것은 지난 3월 중국이 극비리에 주도한 물밑 협상 끝에 사우디와 이란이 7년 동안 단절됐던 외교 관계를 복원한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당시 미 국무부는 환영 입장을 냈지만, 내부적으로 당혹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을 틈탄 중국의 ‘외교적 승리’라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이후 미국은 사우디 외교에 힘을 쏟고 있다. 외교·안보 라인 핵심 수뇌부가 잇따라 사우디로 날아가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났다.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5월 빈 살만을 찾아가 아프리카 수단의 무력 충돌 사태에서 사우디가 미국인 철수를 도와준 것에 사의를 표했다. 지난 7일 블링컨은 사우디를 방문해 테러 단체 이슬람국가(IS) 잔당 격퇴와 분쇄를 위해 6억달러(약 768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블링컨의 사우디 도착에 맞춰 앙숙으로 으르렁대던 미 프로골프(PGA) 투어와 사우디 LIV(리브) 골프가 전격 합병을 선언한 것도 사우디의 마음을 얻으려고 바이든 행정부가 관여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미국은 반면 전통적인 우방으로 협력해 온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관리와 통제에 나서고 있다. 미국의소리(VOA)는 17일 “이스라엘이 중국과 진행하려던 경제 협력 프로젝트 일부를 미국의 압력을 받아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중국이 이스라엘 하이파항(港) 운영과 텔아비브 경전철 사업 등에 참가하며 입지를 넓히는 것에 미국이 본격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게달리아 에프터먼 이스라엘 라이히만대 교수는 “인프라와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참여를 막으려는 미국의 압박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구상대로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국교 수립에 합의할 경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이스라엘과 UAE·바레인·모로코·수단 등 아랍 국가들의 수교를 성사시킨 ‘아브라함 협정’을 바이든 행정부가 확장하는 모양새가 된다. 크게 내세울만한 외교 성과를 아직 내지 못한 바이든에게 사우디·이스라엘 수교는 내년 대선에서 대표적인 외교 치적으로 앞세울 만한 것이다.
다만 요란한 행보에 비해 구체적 성과가 없을 경우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외교 전문지 더디플로맷은 “최근 중동 국가들은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보다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할 방법을 찾고 있다”며 “이들을 붙잡지 못하면 중동에서의 미국 패권은 종말을 맞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