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 도착한 탈레반은 한 군벌이 소유한 고급 저택을 동영상으로 찍어 세상에 공개했다. 대형 샹들리에로 가득 찬 거실에는 대형 벽걸이TV가 꽃병을 양쪽에 거느린 채 걸려 있고 금빛을 띠는 소파가 놓여 있다. 집은 전체적으로 앤티크풍인데 ‘부유하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제니퍼 무르타자시빌리 피츠버그대 교수는 탈레반이 이런 동영상을 공유하는 게 전략적 행동이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미 외교안보전문지 ‘더 디플로맷(The diplomat)’과 가진 인터뷰에서 “탈레반의 메시지는 아프간 대중들이 가진 불만의 주된 원인이 부패였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이다”라고 봤다. 25년 전인 1996년, 부패한 군벌들을 향한 대중의 불만은 탈레반이 아프간의 권좌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오늘날 과거와 비슷한 또 다른 부패는 한 번 몰락했던 탈레반의 부활을 부채질했다.
미국의 매거진 ‘내셔널지오그래픽’은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간 칸다하르주에 위치한 한 부족을 소개했다. 강변을 낀 마을에서 살고 있는 부족의 원로는 한탄하듯 말한다. “20년 동안 전 세계가 이 나라에 들어왔고 해외에서 돈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우리에게는 어떤 도움을 줬는지 모르겠다. 만약 물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면, 만약 전기가 들어온다면 우리는 아마도 전쟁 대신에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도로가 포장됐다면 지금과 같은 재앙은 없었을 것이다.”
“도시 vs 농촌, 두 세계관의 전쟁”
대신 그는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미국의 침공으로 축출됐지만 변한 건 없다고 말했다. “칸다하르에 우리에게 필요한 시설이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지역에 있는 유일한 대규모 병원은 1970년대에 중국인들이 지은 게 전부다. 주도(州都)인 칸다하르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이곳도 격차가 문제다. 아프가니스탄의 도시와 농촌 사이 격차가 확대된 건 탈레반이 몰락하고 미국이 들어온 지난 20년 동안에 급격하게 벌어진 일이다. 카불의 지배계급은 이런 격차를 애써 무시해왔다. 카불에 본부를 둔 전쟁평화연구소의 설립자인 타밈 아세이 전 아프간 국방차관은 이를 ‘두 개의 세계관이 벌이는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쪽에는 보다 진보적이고 온건하며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농촌 사람들과 접촉해 본 적 없이 성장한 아프간 도시인들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카불의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중앙집권적 국가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보수적인 아프간 시골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 50년 동안 아프간에서는 쿠데타가 있었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도 했으며 내전도 벌어졌다. 1973년 한 아프간 장군은 군대를 동원해 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5년 뒤인 1978년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암살하고 공산정권을 세웠다. 인기 없는 공산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은 이듬해 아프간을 침공했고 10여년간 강대국을 상대로 한 약소국의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당시 게릴라전의 주역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이었고 그들은 결국 소련을 철수시켰다. 무자헤딘의 주요 세력은 이후 아프간 내 군벌로 변모했는데, 이들은 이내 분열했고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런 혼란한 틈을 노리고 1996년 아프간 정권을 잡은 건 탈레반이었다. 탈레반은 샤리아(엄격한 이슬람 율법)를 도입해 여성과 소수민족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우상숭배라며 타 종교의 문화재를 파괴하고 알 카에다를 자신들의 땅에 은신시키며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도 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공격의 배후를 뿌리 뽑기 위해 아프간을 공격했지만 여기에 또 다른 계획을 추가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곳에 정착시킨다면 아프간이 두 번 다시 테러조직의 피난처가 되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정치’ 아닌 ‘도둑 정치’의 안착
카불에 정착시키려고 했던 미국식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반칙이었다. 워싱턴포스트가 2019년 정부의 문서들을 입수해 전한 ‘아프간 페이퍼: 전쟁의 비밀 역사’란 탐사보도는 미국 정부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프간 정치에 끼친 악영향을 묘사하고 있다. 아프간 부족의회가 모여 새 헌법을 만들던 2002~2003년, 미국 정부는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자신들의 뜻을 지지하는 대표들에게 달러를 선물했다. 그들은 이걸 ‘좋은 패키지(nice package)’라고 불렀다. 익명의 정부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그 시기 부족의회 멤버들의 인식은 이랬을 거다. 만약 워싱턴이 선호하는 투표를 할 거라면 패키지를 얻지 못하는 게 어리석은 일일 거라고.”
2005년 아프간에서 총선이 열릴 무렵에는 이런 인식은 상식처럼 굳어졌다. 의원들은 자신들의 투표가 미국에 수천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미국대사관에 가서 이 돈을 받은 뒤 그 경험을 주변 정치인과 공유했다. 앞선 관계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아프간 엘리트들의 경험에는 돈이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식의 금권정치는 아프간 정부 내에서도 만연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전쟁에 참전한 뒤 아프간에서 활동했던 전직 육군 대령의 경험을 전했다. 그는 “2006년부터 아프간 정부는 권력자들이 약탈할 수 있는 도둑질을 조직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도둑 정치’라고 표현했다. “아프간 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좋은 통치가 아니라 도둑 정치가 됐고, 이건 우리의 순진함과 부주의 때문이다”라는 게 그의 얘기다.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뒤 교육, 정치 참여, 여성의 지위는 향상됐다. 하지만 외부에서 투입되는 돈의 홍수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를 악화시켰다. 각종 원조와 계약 탓에 도시는 거품경제에 시달렸다. 미국이 2001년 이후 아프간 재건에 투자한 돈만 1440억달러에 달한다. 시대 보정을 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재건에 투자한 돈보다 많다. 그런 투자가 이뤄낸 결과는? 여전히 아프간 농촌은 전기나 수도 없이 사는 곳이 부지기수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형 농업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탈레반이 물러난 뒤 첫 대통령이 된 하미드 카르자이는 이런 격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농촌 개발 프로젝트를 꺼내들었다. 불과 며칠 전 탈레반을 피해 탈출한 아슈라프 가니 전 대통령은 카르자이 내각에서 재무장관이었고 이 개발사업의 돈줄 역할을 맡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재건 자금 중 수십억달러가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아프간 국토 중앙을 반지처럼 도는 링로드(Ring Road)가 대표적이다.
이런 재건사업과 관련한 계약은 종족, 혈연 등의 네트워크를 따라 군벌과 카불 엘리트들의 손에 통제됐다. 반부패 비영리단체인 ‘인테그리티 워치(Integrity Watch)’는 “대부분의 중요한 계약은 여전히 고위 공무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2020년 10월 미국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이 공개한 보고서는 “재건 자금 630억달러 중 약 190억달러가 횡령, 사기 등으로 손해를 입었다”고 기술했다. 아프간 전역에 뿌려져야 할 돈은 어디로 간 걸까.
카불 엘리트들을 눈감아주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형인 마흐무드 카르자이와 같은 인물을 통해 돈의 행방을 짐작할 수 있다. 동생이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미국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던 자영업자에 불과했지만 아프간에 돌아와서는 시멘트 공장, 부동산 개발, 은행 등을 소유한 거부로 거듭났다. 2010년 그가 대주주로 있던 카불은행이 파산 위기에 처했던 때가 있었다. 독립된 기관의 조사에서는 은행에 있어야 할 9억달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아프간 국내총생산(GDP) 120억달러의 8%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는데 마흐무드는 그 돈을 빼돌린 당사자로 의심받았지만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랬던 그는 동생에 이어 아프간 대통령이 된 가니 정부에서 도시개발부 장관에 임명된다. 도시 인구를 위한 주택 공급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는데, 이 사업들 역시 정부 자금(재건 비용)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다. 미국은 합법적 정치 시스템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마흐무드와 같은 카불 엘리트들의 부패에 눈을 감거나, 오히려 이를 약점으로 활용해 통제하려고 했다.
해외 자금으로 촉발된 부패 문화의 직격탄을 받은 곳은 지방이었다. 특히 공권력이 피해를 입었다. 모하마드 아마디 전 칸다하르 주지사는 “경찰서에 15명의 경찰관이 필요한 경우 실제 배치되는 건 3명뿐이며 나머지 인건비는 사라졌다”고 말했다. 덕분에 탈레반은 싸우지도 않고 지방의 곳곳을 통과해 카불을 향해 빠르게 진군할 수 있었다. 아프간에서 세 번째 도시인 헤라트를 탈레반이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고작 하룻밤이었다. 주지사를 포함한 고위 관료들, 수백 명의 병력은 탈레반이 몰아치자 곧바로 자신들의 직을 버렸다. 탈레반은 부패로 포장된 길을 타고 카불을 점령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16일(현지시각) 백악관 이스트룸에 섰다. 탈레반의 공세 속도를 오판한 미국은 전 세계에 마치 사이공 탈출과 같은 굴욕적인 모습을 송출해야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아프간군 스스로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서 미국인이 싸울 수도 없고 싸워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며 책임이 아프간 쪽에 있다고 못 박았다.
반면 무르타자시빌리 교수는 “아프간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싸우지 않기로 선택했다. 아프간 정부를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직면한 뒤, 많은 아프간인들은 ‘아니오’라고 답했다. 고립되고 탄약이 없는 시골 기지에서 왜 궁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하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