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스파이들의 스승(Masterspy of Moscow)’이라 불리는 영국과 러시아 이중간첩 조지 블레이크(98)가 26일(현지 시각) 사망했다고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이 밝혔다. 블레이크는 영국 비밀정보국 MI6 요원 신분으로 소련을 위해 첩보 활동을 한 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북한군 포로로 잡혀갔다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소련 편에 선 첩자라는 사실이 발각돼 영국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대법관은 “그가 소련에 전달한 정보로 인해 영국의 첩보망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블레이크는 1922년 네덜란드의 스페인⋅유대계 영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21세에 영국으로 넘어와 해군에 입대했고, 이듬해 MI6 요원이 됐다. 25세에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러시아어를 익혔다. 1948년 주한 영국대사관 부영사 직함을 달고서 MI6가 설치한 서울 거점의 요원으로 파견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3년간 평양부터 압록강까지 끌려 다녔다. 이때 소련 대사관이 외국 포로들에게 나눠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하고 공산주의자가 됐고, 소련대사관을 통해 소련 정보기관인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과 만나 면접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목격한 6·25전쟁의 참화가 소련 쪽으로 전향한 계기였다고 했다. 2011년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거대한 미군 폭격기들이 북한의 조그만 마을들을 인정사정없이 공습했다”며 “무방비의 사람들을 첨단 기술로 공격하는 국가들 편에 내가 섰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그는 “내가 잘못된 편에 섰고, 공산주의 체제가 승리해 전쟁이 끝나는 것이 인류에 더 나은 일이라 여겨졌다”고 했다. 1991년 모스크바에서 로이터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공산주의는 고귀한 사상”이라고 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MI6 요원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소련을 위해 첩보 활동을 했다. 그는 1950년대 동유럽에서 활동하던 서유럽 첩보원 400여 명의 신원을 소련에 넘겼다. 첩보원 42명이 그가 넘긴 명단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공산권을 겨냥한 서방의 정보 수집전은 큰 타격을 입었다. 블레이크는 1990년 BBC 인터뷰에서 “내가 정보를 넘긴 서방세계 요원 숫자는 500~600명”이라고 했다. 영·미가 군사용 도청 장치를 설치한 지역 기밀을 흘려 소련이 이를 이용해 서방국에 거짓 정보를 흘려보내게 하기도 했다.
그가 이중 첩자라는 것이 들통난 것은 1961년이었다. 폴란드 첩보요원이 서방국가에 망명하면서 넘긴 ‘영국 정보기관에서 암약(暗躍)하는 소련 첩자 명단’에 블레이크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1961년 42년형을 선고받고 영국 감옥에 갇혔지만, 5년 만에 탈옥에 성공했다. 1966년 10월 감옥에서 만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악기 가방(하프 케이스)에 몸을 숨겨 탈출했다. 이듬해 1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소련 정보기관인 KGB(국가보안위원회)의 도움으로 모스크바로 넘어갔다. 그는 ‘배신자’라는 비난에 대해선 “배반하려면 먼저 어디에 속해야 하는데, 나는 결코 어디에 속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탈옥 이후 숨지기 직전까지 러시아에서 ‘국가 영웅’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레고리 이바노비치’라는 러시아 이름을 갖고 첩보원을 교육했고, KGB 소속 요원에게 주는 연금도 받았다. 과거 KGB에서 일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의 첩자 활동을 높이 평가해 2007년 훈장까지 줬다. 푸틴은 26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탁월한 전문가이자 빼어난 용기를 갖고 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블레이크의 조국인 영국 정부는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영국 BBC는 27일 “블레이크의 진정한 문제는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고서도 신념을 바꾸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