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선발과 협연자·연주곡 선정까지 지휘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하지만 지휘봉에선 정작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지휘자는 그 간극에서 몸부림치는 존재다. 강남 심포니의 여자경(50), 인천시향의 이병욱(46), 부산시향의 최수열(42)씨는 한국 음악계를 이끌 차세대 지휘자로 주목받는 음악인들. 이들 모두 악단의 예술감독을 처음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30일부터 다음 달 22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교향악축제를 앞두고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코로나 시대에 가장 외로운 음악가는 실은 지휘자다. 기악 연주자들은 독주곡이라도 홀로 연주할 수 있지만, 지휘자들은 단원 없이는 무대에 설 수도 없다. 최씨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유일한 음악가가 지휘자”라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른 단원들을 통해서 구현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직업”이라며 웃었다. 지난해 이들은 서너 달씩 연주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재택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씨는 “지휘봉 대신에 전화통을 붙잡고 연주 계획을 변경하고 취소하는 일을 1년 내내 거듭했다”고 말했다.
국내 악단에서도 단원들의 확진 사례가 종종 나오면서 방역에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현악 단원들은 보면대(譜面臺)에 올려놓는 악보를 2명씩 함께 보면서 연주했다. 하지만 지금은 ‘1인 1보면대’가 원칙이다. 리허설과 연주회 때도 숨결을 불어넣는 관악 파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마스크를 쓴다. 여씨는 “마스크를 쓰고 몇 시간씩 지휘하면 땀으로 온통 사우나를 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연주 중에 단원들이 지휘자의 표정을 보기 힘들다는 점도 애로 사항이다.
코로나 시대는 악단의 ‘먹거리’인 연주 곡목에도 영향을 미친다. 말러·브루크너처럼 단원이 100명 가까이 필요한 후기 낭만주의의 대곡들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에 연주하는 단원을 절반으로 줄여서 모차르트·베토벤 같은 고전파 작품들에 치중했다. 음악 전공생들의 취업 형편이 열악해지면서, 입단 경쟁률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금관 단원 1명을 모집하는 데 서른 명씩 몰려들고, 바이올린 파트에서는 100대1의 경쟁률에 훌쩍 이르기도 한다.
과거 지휘자들은 ‘독재자’로 통했다. 교향악단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음악 감독’이나 ‘예술 감독’이라는 직책을 부여받고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입사하자마자 곧바로 부장 되는 격이라고 할까. 악단 연주뿐 아니라 인사·행정과 경영까지 안방살이 전반을 책임지는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인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유행어였던 “똥덩어리”도 실은 지휘자 ‘강 마에’(김명민)의 대사였다. 예전 음악계에서는 연주 도중에도 고언과 욕설, 삿대질이 오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은 큰일 날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다. 최씨는 “지휘자는 악단의 주인 행세를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짐 싸서 떠나야 한다는 점에서 실은 세입자나 손님에 가깝다. 오케스트라의 진짜 주인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단원들”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음악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옛말”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레퍼토리의 제약이 적지 않지만, 언젠가는 연주 곡목과 장르를 넓히는 것이 이들의 음악적 포부. 최씨는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관현악곡에 공들이고 있다. 이씨는 모차르트·베르디·브람스의 ‘레퀴엠’을 차례로 지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씨는 본격적으로 오페라 지휘에 나서는 것이 목표다. 올해 교향악축제에서는 인천시향(4월 6일), 부산시향(9일), 강남심포니(15일)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여씨는 “코로나 여파가 계속되면서 무대에서 인사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럽다. 연주 도중에 시끄러운 관객들도 모두 그립고 고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