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수연 기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며 한국 영화 황금기를 상징해온 원로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1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지미는 최근 건강이 악화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대상포진 감염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투병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 17세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700편을 남긴 ‘시대의 얼굴’
1940년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난 김지미는 덕성여고 재학 중이던 1957년, 명동 거리에서 김기영 감독에게 발탁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데뷔작 ‘황혼열차’를 시작으로, 그는 단숨에 시대를 대표하는 얼굴로 자리잡았다.
청초한 외모와 압도적인 화면 장악력은 곧바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비구니’, ‘길소뜸’, ‘토지’, ‘티켓’, ‘춘희’, ‘을화’ 등 생애 출연작이 700편에 달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960~70년대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한 해 30편이 넘는 영화를 촬영할 만큼 숨 가쁜 스케줄을 소화했고, 그 시기의 한국 영화 포스터는 대부분 그의 얼굴로 채워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평단과 언론은 그를 두고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렀다.
■ 연기상 휩쓴 당대 톱스타…제작·행정까지 지평 넓힌 ‘영화인’
연기력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김지미는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 부일영화상 등 당대 주요 시상식을 휩쓸며 ‘흥행 스타이자 연기파 배우’라는 독보적 위치를 굳혔다.
1980년대에는 직접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하며 제작자로도 활약했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티켓’,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 등이 그의 손을 거쳤고, 훗날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회자되며 제작자로서의 안목을 입증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영화계 행정에도 힘을 보탰다.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스크린쿼터 사수 비대위 공동위원장 등을 맡으며 산업 전반의 발전에 기여했다. 2016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 네 번의 결혼, 다섯 번의 이혼…화려하고도 파란만장했던 개인사
김지미의 사생활은 그 시대 대중에게 하나의 ‘연예사’였다. 1958년, 데뷔 1년 만에 16세 연상의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지만 4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최무룡과 재혼해 딸 최영숙을 두었으나, 1969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결별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국민가수 나훈아와 사실혼 관계로 6년을 함께 살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후 1991년 한 의사와 재혼했으나 2002년 다시 이혼하며 네 번의 결혼과 다섯 번의 이혼이라는 파란만장한 행보를 남겼다.
■ 은퇴 후 미국으로…생의 마지막까지 영화인으로 기억되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 김지미는 미국 LA에서 생활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여러 차례 회고전이 마련됐고, 최근까지도 고인을 향한 존경과 재평가가 이어졌다.
그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영화계는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 관계자는 “한 시대를 대표한 배우이자 영화인”이라며 “그의 존재 자체가 한국 영화의 역사였다”고 추모했다.
■ “700편의 필모그래피”…한국 영화의 한 장이 닫히다
김지미가 남긴 영화는 700편, 활동 기간은 40년, 수상 경력은 수십 차례에 달한다. 누군가는 그를 ‘당대 최고 미인’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한국 영화사를 움직인 배우’로 칭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배우의 삶이 곧 하나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한편 고인의 장례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주관의 영화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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