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맨틱 에러·블루밍

20대 여성 A씨는 순정만화 그림체 15세 관람가 웹툰을 보다 BL(Boy’s Love·보이즈 러브) 장르에 입문했다. 10회 차 쯤 보고 나서야 이것이 남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하는 데다 남주인공들 중 한 명의 캐릭터 디자인이 숏컷한 여자로 인식될 만큼 예뻤기 때문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고 했던가. 착각을 계기로 거부감 없이 BL장르를 받아들인 뒤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차례로 BL웹툰, 웹소설 플랫폼 도장을 깨고 이제는 BL드라마까지 손을 뻗었다.

BL웹드라마 '시맨틱 에러'가 5주째 온라인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 시청 순위 1위를 유지 중이다. 지난 2월16일 공개 직후 1위를 기록한 '시맨틱 에러'는 '좋좋소' 시즌5와 1, 2위를 다투더니 4회 공개 후 줄곧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시맨틱 에러'는 미대생 장재영(박서함)과 공대생 추상우(재찬)가 교양 수업과 게임 제작 프로젝트로 엮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캠퍼스 로맨스다. 비록 왓챠 구독자 수가 OTT(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계 1위 넷플릭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국내에서 마이너 장르로 분류되던 BL 영상 콘텐츠 최초로 유의미한 대중성을 확보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네가 외계인이든 남자든 상관 안해." 이것이 BL 세계관이다. BL은 HL(Hetero Love·헤테로 러브)와 달리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이 남·남일뿐이다. BL드라마 역시 서사 주체가 남성인 것만 제외하면 여타 로맨스 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다. BL드라마에서 남성과 남성은 연인이 되고, 애정 문제로 갈등하고, 스킨십을 나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나 성정체성으로 인한 갈등이 중심 소재인 퀴어물과도 차이가 있다. BL이 이와 같은 주제 의식을 전혀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BL 세계관에서 남성이 남성에게 마음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BL드라마는 앞으로 꾸준히 제작될 전망이다. '시맨틱 에러' 흥행에 이어 주요 영화투자배급사 NEW는 지난달 31일 '블루밍'을 시작으로 BL드라마 '따라바람', '본아페티', '트랙터는 사랑을 싣고'를 차례로 공개한다. '블루밍'은 아이치이(iQIYI)와 NBC 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재팬(NBC Universal Entertainment Japan)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과 만난다. BL웹드라마 '나의 별에게'는 시즌2 제작 확정 후 방영을 앞두고 있으며 콘텐츠 플랫폼 기업 리디(리디북스) 인기 BL소설 '신입사원', '을의 연애'도 영상화 소식을 전했다. 드라마 제작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키다리스튜디오도 영상화될 자사 BL웹툰 목록을 공개했다.

코로나 확산 이후 급격히 성장한 OTT 산업은 BL드라마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시청층 특정이 어려운 TV 드라마와 달리 OTT는 취향에 맞게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TV 드라마보다 타깃 시청층을 정교하게 조준할 수 있다는 뜻이다. BL을 선호하는 이용자들이 '시맨틱 에러' 공개 후 왓챠로 몰렸고, 이에 힘입어 '시맨틱 에러'는 왓챠의 대표 오리지널 콘텐츠가 됐다. 한 OTT 업계 관계자는 "영상 콘텐츠 시장에서 대작 쏠림 현상이 줄어들고 개인의 취향을 중요시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마이너 장르가 힘을 얻으면서 BL드라마도 콘텐츠 다양성 재고에 이바지했다"고 분석했다.

BL소설 원작 중국 웹드라마 '진정령' 역시 OTT 플랫폼 웨이브를 통해 국내 시청자들에게 향유됐다. '진정령'은 2020 웨이브어워즈 해외 시리즈 아시아 드라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시맨틱 에러'만큼은 아니더라도 주연 왕이보의 커뮤니티 단독 공간이 만들어질 정도로 국내 인기가 급상승하는 등 탄탄한 팬덤 구축에 성공했다. OTT 업계는 BL드라마 경쟁력을 실감하고 있다. 과거 해외 BL 시리즈 위주로 판권을 보유했던 OTT 플랫폼 관계자는 "'시맨틱 에러'가 좋은 성적을 낸 후 국내 BL 콘텐츠 수급 제안이 확실히 늘었다. BL이 주목받고 있는 장르인 것은 확실하다"고 밝혔다.

최근 제작되는 BL드라마의 대표적인 특징은 가벼운 장르·낮은 수위다. 자극적인 설정, 노골적인 스킨십 장면이 없거나 적은 12금, 15금 학원물, 캠퍼스물이 대부분이다. '시맨틱 에러'의 경우 원작 웹소설은 19금이었지만 웹드라마의 경우 수위를 12세 이상 관람가로 낮췄다. '블루밍'도 마찬가지로 12세 관람가다. 최근 최근 한 달간 왓챠 시청률 상위 5% 안에 든 '새빛남고 학생회'도 미성년자 관람 가능 작품이다.

BL드라마 제작사도 수위가 높지 않은 대본을 선호한다. 지난해 제작사 무빙픽쳐스 컴퍼니 BL 웹드라마 시나리오 공모전 요강에 따르면, 장르·형식·소재 제한은 없으나 관람 연령가가 15세 기준이다. 18세 관람가 이상 작품 제출은 불가능하다. 이는 처음 BL드라마를 소비하는 이들의 거부감을 줄이고 새로운 시청층 유입을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BL 웹소설과 웹툰이 BL드라마의 원천 IP(Intellectual Property·지식재산권)로 급부상했다. '시맨틱 에러'는 웹소설과 웹툰을 거쳐 웹드라마로 만들어졌고, '겨울 지나 벚꽃', '블루밍'도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인기 BL 웹툰 '하숙집5번지'도 시트콤으로 제작된다. 한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시맨틱 에러'가 흥행 물꼬를 트면서 BL웹소설, 웹툰의 원천 IP로서 저력이 입증됐다. 이제 영상화가 본격적으로 탄력받는 시점이다. 영화 제작사도 BL드라마 제작에 뛰어들 정도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인기 있는 BL콘텐츠를 무턱대고 드라마로 만들 수는 없다. BL이 활자, 2D로 남을 때와 3D가 될 때 상황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BL웹소설·웹툰 콘텐츠에서는 데이트 폭력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강압적인 성향을 가진 캐릭터도 '광공'(狂攻·미친 공)으로 포장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때 '공'은 BL 콘텐츠 내에서 성적인 의미로 톱(top)을 의미하는 단어다.

헤테로 로맨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비판받는 강제 성관계, 언어·신체 폭력, 가학적인 장면도 BL장르에서는 일정 부분 용인된다. 상대적 약자인 여성이 배제된 남성 간의 로맨스라 가능한 일이다. 그런 BL 콘텐츠가 접근성 높은 실사 영상물로 제작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령 최근 영상화를 확정한 성인 BL웹툰 '킬링스토킹'은 스토킹, 납치, 감금, 살인, 강간 등 수많은 범죄를 상세하게 다룬다. 드라마 제작 소식이 전해지자 원작 팬들마저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배우 매니지먼트 업계도 BL드라마를 전보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복수의 소속사 관계자에 따르면 BL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배우들 역시 전보다 진지하게 BL드라마 출연을 고려 중이다. BL드라마로 신인 배우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시맨틱 에러' 흥행 후 주연 배우 재찬이 속한 그룹 '디케이지(DKZ)'(옛 동키즈)의 늘어난 음반 판매량이 증명하듯 팬덤 형성에 도움이 되는 만큼 노골적인 수위 작품만 아니라면 출연 가능성을 폭넓게 열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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