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코리아/그래픽=김의균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면, 메가급(초대형) 광산 기업을 만들 수 있는 합병을 검토할 것입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원자재 기업 글렌코어의 최고경영자(CEO) 게리 네이글은 지난 18일 실적 발표 후 컨퍼런스콜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로벌 광산업체 리오틴토와 진행한 2600억달러(약 380조원) 규모 인수·합병(M&A) 협상이 이달 초 무산된 지 불과 2주 만에 글렌코어가 다른 광산업체와의 빅딜 추진 가능성을 열어뒀음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양 사의 합병 시도는 2014년과 2024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만약 성사됐다면 세계 최대 규모의 광산 기업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특히 이번 협상은 AI(인공지능) 열풍을 타고 구리 수요가 급등한 가운데 이뤄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글로벌 광산업계에 M&A 바람이 불고 있다.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을 비롯해 AI 훈련과 구동을 위한 데이터센터까지 첨단 산업 전반에서 핵심 광물로 꼽히는 구리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며 벌어지는 현상이다. 영국 광산업체 앵글로 아메리칸은 최근 캐나다 경쟁사인 텍리소스와 530억달러 규모 합병을 완료했다. 이번 합병으로 탄생하는 ‘앵글로텍’은 세계 5대 구리 생산업체로 거듭날 전망이다. 미국 로펌 화이트앤드케이스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광산업계의 M&A 규모는 940억달러에 육박해 201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WEEKLY BIZ는 광산업계를 흔들고 있는 M&A 확산 열풍의 배경과 흐름을 들여다봤다.

◇구리 수요 급증하는데 공급은 태부족

최근 광산업계는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구리는 우수한 물리·화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어 데이터센터 구축을 비롯해 전력망 확충, 전기차, 재생에너지 설비까지 미래 산업 전반에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실제 전기차에는 내연기관차보다 최대 네 배 이상 많은 구리가 들어간다. 전기 전도성이 뛰어나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에도 막대한 양의 구리가 사용된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S&P 글로벌은 전 세계 구리 수요가 지난해 2800만t에서 2040년 4200만t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수요는 크게 늘고 있지만 광산업계의 공급량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구리 생산지가 세계 곳곳에 분산된 탓에 광산업계가 합종연횡을 통해 덩치를 키우지 않는다면 증산 자체가 쉽지 않은 구조여서다. 예컨대 글렌코어와 리오틴토의 합병 시나리오에서 기대되는 연간 구리 생산량은 약 160만t으로 단일 기업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지만, 여전히 전 세계 광산 생산량의 약 7%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구리연구그룹(ICSG)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운영 중이거나 건설 계획 중인 구리 광산만 650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 광산업체 퍼스트 퀀텀 미네랄스의 트리스탄 패스컬 최고경영자(CEO)는 광산업계 M&A 열풍에 대해 “파이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조각만 바뀌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광산 개발을 위한) 신규 투자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했다.

구리 가격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일 기준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되는 구리 가격은 t당 1만2749달러로 3년 전 시세(약 9000달러)보다 약 43% 올랐다. 구리에 대한 각국 정부의 전략적 비축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 지질조사국(USGS)은 구리를 국가 안보·경제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로 지정했다.

◇구리 광산 개발에 평균 17년이나 소요

그렇다고 해서 그린필드 프로젝트(신규 광산 개발)에 뛰어드는 것은 광산업계 입장에서 사실상 운을 시험하는 도박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규 광산 개발은 적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소요되는 데다 성공 가능성도 희박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업계에서는 새 구리 광산을 찾아 생산에 들어가기까지 평균 17년이 걸리는 것으로 본다.

한시가 급한 광산업계에서 M&A는 구리 생산 경쟁력을 신속하게 확보하기 위한 사실상 유일한 전략적 선택지로 평가받고 있다. 신규 광산을 개발하는 것보다 더 빠르지만, 비용은 적게 들고, 실패 위험까지 낮은 광물 확보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S&P 글로벌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최근 추가로 발견된 구리 자원의 70%가량은 이미 알려진 매장지에서 나왔다.

광산업계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광산이 노후화되면서 채굴 난이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M&A로 눈을 돌리는 배경이다. 세계 구리 생산 중심지인 남미의 경우 20년 전만 해도 원광석 100t에서 약 1.3t의 구리가 나왔으나 현재는 0.7t 수준으로 채산성이 뚝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금리 하락 기조는 M&A에 필요한 업계의 자금 조달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 2024년 사상 최고 수준의 현금 보유액을 자랑하던 주요 광산업체들이 저금리로 추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장 광산업체 주주들 역시 단기간 실적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M&A를 선호하는 분위기다.

◇핵심 광물 선점 움직임도 잇따라

구리뿐만 아니라 니켈, 망간 등 미래 산업의 핵심 광물에 대한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하면서 이를 선점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중국알루미늄공사(Chalco·찰코)는 리오틴토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브라질 알루미늄 기업 CBA를 인수했다. CBA는 보크사이트 채굴·정제·제련을 포함한 저탄소 통합 알루미늄 생산 체계를 갖춘 기업이다. 지난 20년 동안 철광석 부문에 크게 의존해 왔던 호주의 세계 최대 광산업체 BHP와 리오틴토 역시 중국의 철강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차세대 성장 동력을 구리에서 찾고 있다.

노후화됐거나 탄소 배출이 높은 자산 등을 매각한 뒤 미래 핵심 광물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는 업체들도 있다. 호주의 광산·금속업체 사우스32는 미 애리조나주에서 추진 중인 5500만달러 규모 광산 개발 작업인 ‘헤르모사 프로젝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2024년 제철용 석탄 광산을 16억5000만달러에 매각했다. 헤르모사 광산에는 배터리 주요 원료 가운데 하나인 망간이 대량 매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제조업·금융업과 달리 광산업계의 M&A 역량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드컴퍼니는 보고서에서 “광산업체들은 업종 특성상 가격 사이클에서 최적의 시점에 고품질 자산을 확보하고, 포트폴리오 내 시기별 균형을 맞추는 데 강점이 있다”면서도 “인수 후 시너지 극대화나 통합 최적화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한 사례는 드물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