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인가 물개인가. 불끈한 광배근을 휘저으며 물살을 척척 갈라내는 수영 선수를 보면서 관객들은 이렇게 말한다. “와, 저 선수 혹시 약 먹고 출전한 거 아니야?”
공식적으로 약 먹고 출전해도 되는 일명 ‘도핑 올림픽’이 오는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를 슬로건으로 내건 ‘강화 게임(Enhanced Games)’이다. 호주 출신의 벤처사업가 에런 디수자(D’souza)가 2023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한 동명의 회사가 여는 대회다. 경기력 향상 약물(PED·Performance Enhancing Drugs) 사용을 금지하는 반도핑 올림픽과 다르게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모든 약물 복용을 허용하기로 해 스포츠계에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약물 허용 경기’라니…
석 달 후 열리는 이 경기는 현재까지 수영, 육상, 역도 등 분야에서 다수의 국제 스포츠 스타를 참가자 목록으로 확보했다. 수영에서는 2012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제임스 매그너슨,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금메달리스트인 영국의 벤저민 프라우드 등이 합류했다. 육상에서는 미국 단거리 세계 챔피언 프레드 컬리, 세계 100m 은메달리스트인 마빈 브레이시-윌리엄스 등의 스프린터가 이름을 올렸다. 주최 측은 종목별 우승자에게 최대 25만달러(약 3억6600만원)의 상금을 지급하고, 세계 신기록을 달성할 경우 최대 100만달러(약 14억6500만원)의 보너스를 준다는 계획이다.
올림픽 정신에 도전하는 이 대회가 경기 계획을 발표한 3년 전, 세계 스포츠계의 반응은 한목소리로 부정적이었다. “이 경기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험하고 무책임한 광대극일 뿐”(세계반도핑기구·WADA) 등의 반응이 나왔다.
특히 WADA는 “(PED) 등 약물은 특정 치료 목적에 한해, 특히 의료 전문가의 감독 아래서 처방돼야 한다”며 “이 대회는 강력한 약물과 방법을 조장함으로써 선수들의 건강과 복지를 명백히 위협할 것”이라며 우려했다. 또 “스포츠의 아름다움과 인기는 깨끗하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상에 기반한다”며, 도핑 올림픽이 스포츠의 진정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장하고, 제품도 판다?
대회 개최가 다가올수록 이번 행사가 스포츠 이상주의자가 만든 대회라기보다, 규칙에 도전하면서 영리를 추구하는 비즈니스 실험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강화 게임 측은 현재 대회 홈페이지에 경구용 테스토스테론 캡슐과 테스토스테론 주사제, 테스토스테론 분비를 자극하는 엔클로미펜 캡슐 등을 올려놓고 ‘예약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대회 중계를 통한 수익 창출뿐만 아니라 직접 소비자를 대상으로 테스토스테론 대체 요법 등 성능 향상 제품을 판매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테스토스테론 등은 처방 없이 판매가 금지된 의약품으로, 이 업체는 향후 원격 진료 기반 의료 서비스와 결합한 시장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다만 스포츠 이벤트와 성능 향상 마케팅이 결합할 경우 미국 규제 당국이 그냥 보고둘지는 미지수다. 규제의 경계선에서 시장의 반응을 떠보는 실험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 업체는 나스닥 입성도 추진한다. 현재 기업 가치는 12억달러로 평가받고 있는데, ‘A 파라다이스 애퀴지션’이라는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을 통해 상장해 투자금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트럼프, 그리고 피터틸
투자자 중엔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지난해 자신의 투자 펀드인 1789캐피털을 통해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강화 게임 웹사이트 성명에서 “이것은 탁월함, 혁신,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지배력에 관한 것이다. 바로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페이팔·팔란티어 공동 창업자이자 미국 실리콘밸리 거물 투자자로 유명한 피터 틸도 이 경기를 지지하고 있다. 그는 의학을 통해 사람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개선하겠다는 ‘트랜스휴머니즘’ 사상가로 유명하다.
◇이단인가, 개척자인가
도핑 올림픽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흥행몰이 성공 조짐을 보이자, 존재 자체에 위협을 느낀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AI(인공지능)를 통한 새로운 반도핑 시대를 열겠다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대회 창립자 에런 디수자가 “어떤 약물을 사용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대회가 약물 사용을 단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기존 대회들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고 공정하다”고 선언하자, 인공지능과 데이터 분석을 활용해 숨겨진 도핑을 더 정밀하게 적발하겠다며 정면 대응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 간판스타로 나선 수영 스타 제임스 매그너슨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호주연합통신(AAP)과의 인터뷰에서 “34세의 나는 약물의 도움으로 몸을 12년 전으로 되돌려 다시 세계 기록에 도전할 것”이라며 “이것은 최초의 시도이고, 우리는 개척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