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기타구에 있는 구 후루카와 정원. 서양관 정원은 일본 근대 건축의 아버지 조시아 콘도르가, 일본 정원은 제7대 오가와 지헤이가 설계했다. /도쿄도공원협회

일본에선 정원을 만드는 사람을 작정가(作庭家)라 부른다. 단순한 정원사가 아니라 예술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의 풍경을 정원 안에 재현해 내는 공간 연출가다. 14세기 초반의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7세기 초반의 고보리 엔슈(小堀遠州)도 유명하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약하면서 ‘근대 일본 정원의 선구자’라 불린 오가와 지헤이 7대(7代目 小川治兵衛) 역시 작정가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다.

오가와 지헤이는 이름에 ‘7대’라는 숫자가 붙어 있는데, 이를 습명(襲名)이라고 한다. 1대는 18세기 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초에는 무사였는데 정원 조성의 길로 들어섰고, ‘칼을 찬 작정가’였다고 한다. 대를 이어 6대까지 내려왔고, 6대는 당시 17세였던 7대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6대는 양자로 받아들인 지 2년 만에 사망했고, 7대는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재능이 있었고, 의뢰인의 의도와 요구를 정확히 파악할 만큼 머리도 좋았다.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긴 7대는 ‘오가와 지헤이 중흥의 아버지’라 불린다. 지금은 12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가업을 승계하고 있다.

오가와의 초기 대표작은 무린안(無隣庵)이다. 러일전쟁 수행 방침을 논의하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이 도쿄로 천도한 이후 교토는 쇠락기를 맞이했는데, 교토를 부흥시키기 위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비와호의 물을 교토까지 끌어오는 것이었다. 일본 3대 및 9대 총리를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 물길을 활용해 정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 부지 내에 개울, 연못, 폭포를 만들고 싶었다. 이끼를 심는 것이 주류이던 시절, 잔디를 심어 밝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작정가에게 ‘알아서 해달라’가 아니라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하니 반드시 맞춰달라’고 지시할 정도로 정원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가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명성은 이미 높았다. 1894년부터 3년에 걸쳐 조성된 무린안은 오늘날에도 많은 관람객에게 정원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무린안이 조성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후루카와 재벌의 3대 당주인 후루카와 도라노스케는 멋진 집을 짓고 싶어 했다. 서양식 저택과 서양식 정원은 조시아 콘도르(Josiah Conder)에게 의뢰했다. 콘도르는 영국에서 건너와 일본 내에서 건축가 양성에 힘쓴 사람으로, 미쓰비시 1호관과 미쓰비시 창업자 가족의 저택 또한 그의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라 해도 손색이 없다. 대지 아래쪽 부지엔 일본 정원이 들어섰는데, 만년의 오가와 작품이다. 일본에선 1912년부터 1926년까지를 다이쇼(大正) 시대라 하는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과 정원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3대 당주는 이 집에서 1926년까지 살았고, 이후에는 후루카와 가문의 귀빈 맞이용 공간으로 활용했다. 2차 대전 후 이곳은 국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도쿄도는 국가로부터 이 공간을 빌려 1956년 도립 정원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그 덕분에 지금 이곳에서 정원 감상을 즐길 수 있다.

일본에선 관료나 기업가뿐 아니라 전통 기술을 지닌 장인에게도 호칭을 세심히 붙이는 문화가 있다. 정원을 가꾸는 이를 통칭해 정원사라 부를 수도 있지만,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경우 작정가라 부른다. 대를 이어 기술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소질이 보이면 양자를 들여 계승시키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장인을 우대하는 문화가 있었기에, 400년 넘게 대대로 도공의 길을 걸으며 유명 도자기인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빚어온 도예 명가 심수관이 15대까지 이어오며 여전히 일본에서 활약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