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말 결산 법인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기업들이 연초에 특히 바쁘다. 작년도 결산 마감과 회계감사, 법인세 세무조정뿐 아니라 이사회와 주주총회 준비까지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동시에 조직의 윤리가 드러나는 시즌이기도 하다. 특히 ‘목표 숫자를 어떻게든 맞춰야 한다’는 회사 안팎의 압력이 커지면, 내부 통제에 미세한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다. 결산 시즌에는 숫자 자체보다, 숫자를 만드는 과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구체적인 숫자를 목표로 삼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목표가 분명할수록 내부 임직원에게는 동기 부여가 되고, 외부에는 기업의 의지와 자신감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거나 이해관계자의 압력이 거센 경우, 목표가 전략이 아니라 공포로 바뀌기도 한다. 회계는 합리적인 범위에서 ‘추정’과 ‘판단’을 허용한다. 문제는 조직이 빠른 해법을 찾으려 할수록, 이 추정과 판단의 영역을 필요 이상으로 ‘편한 길’로 쓰려는 유혹이 커진다는 점이다.
유명한 분식회계 사건들도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엔론은 특수목적회사(SPC)를 이용해 부채를 밖으로 밀어냈고, 월드컴은 비용을 자산으로 처리해 이익을 부풀렸다. 도시바는 실적 압박이 누적되면서 손실 인식을 늦추거나 재고자산 가치를 낙관적으로 잡는 방식이 문제로 지적됐다. 대우조선해양도 공사 진행률 산정과 원가 추정처럼 추정과 판단이 크게 개입되는 항목을 둘러싸고 회계 처리의 적정성이 논란을 빚었고, 결과적으로 시장 신뢰가 크게 훼손됐다. “이번 결산만, 이번 주총만” 무사히 넘기려던 시도가 기업의 미래를 갉아먹었다. 분식(粉飾)회계의 ‘분’은 얼굴에 분칠을 하는 화장을 뜻한다. 숫자에 과한 화장을 얹는 순간, 기업의 신뢰라는 ‘얼굴’ 자체가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 회계학자 아산 하비브 등의 2022년 연구는 이익조정이 꼭 장부 속 숫자를 만지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정리한다. 정상적인 영업 범위에서 살짝 벗어난 ‘현업 의사결정’으로 목표를 맞추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는데, 이를 ‘실물활동 기반 이익조정’이라 부른다. 예컨대 단기 매출을 만들기 위해 연말에 공격적으로 할인하거나, 과잉 생산을 통해 일시적으로 원가가 적어 보이게 하거나, 연구개발(R&D)·마케팅 지출을 줄여 당장 이익을 끌어올리는 행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겉으로는 ‘영업 판단’처럼 보이니 정당화가 쉬운 편이다. 그래서 더 조용히, 더 넓게 번질 수 있다.
대규모 회계부정 사건이 발생하면 법과 제도를 통해 이를 규제하게 된다. 미국은 엔론·월드컴 스캔들 이후 사베인스-옥슬리법이, 우리나라에선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 이후 신외감법이 도입됐다. 대체로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재무보고 책임을 강조하고, 강력한 내부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며, 감사인의 독립성을 강화해 기업들의 일탈을 막고자 하는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하비브 등의 연구가 지적한 흥미로운 부분은 감독과 통제가 강해지면 직접적인 ‘장부 조정’은 줄어들지만, 대신 경영상 판단으로 보일 수 있는 실물 활동 조정이 늘어나는 ‘대체 현상’이 관찰된다는 점이다. 통제를 강화했는데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양만 바꿔 다른 곳에 숨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불편한 지점은 이익조정 이후에 치러야 할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다. 할인 판매는 가격 질서를 흔들고, 과잉 생산은 재고·품질 리스크로 이어지며, R&D·마케팅 축소는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숫자를 화장하는 일”은 장부상 수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경쟁력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한 해의 영업을 다시 시작하는 1~2월, 경영진은 매출과 이익을 키우는 방법만큼이나 회사가 지켜야 할 윤리적 경계선을 점검해야 한다.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원칙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결산의 지나친 압박이 내부통제를 약화시키거나 은근슬쩍 경계를 넘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좋은 결산을 위한 조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