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이라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를 모를 리 없다. 1984년부터 2007년까지 1000엔권에 그의 초상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2000년 아사히신문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서기 1000년 이후 가장 뛰어나다고 꼽힌 문학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의 셰익스피어’, ‘국민작가’라는 수식도 따라붙는다.
2017년 신주쿠구(區)는 그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구립 소세키산방기념관’을 열었다. 산방(山房)은 학자나 예술가의 서재를 뜻한다. 말 자체가 주는 온기가 있다. 소세키는 신주쿠에서 태어났고 말년 9년을 신주쿠에서 보냈다. 그는 그 집을 ‘소세키산방’이라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작품을 썼고, 매주 목요일이면 지인과 문하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 집은 1945년 공습으로 불타 사라졌고, 기념관은 그 터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왜 굳이 신주쿠구가 나서야 했을까. 세금으로 이런 공간을 만든다는 데 반발은 없었을까.
‘국민작가’ 소세키의 흔적은 신주쿠구 곳곳에 남아 있다. 신주쿠구는 이 ‘거리의 기억’을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소중한 문화·역사 자원을 발굴해 계승·발전시키는 길이며, 나아가 구민의 애착과 자부심을 키워 ‘다시 찾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데 도움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다행히도 불에 타 없어진 집터는 구 소유였다. 절반은 소세키 공원으로, 나머지 절반은 공영주택으로 쓰이고 있었다. 개인 소유였다면 가장 먼저 부딪혔을 부지 확보 문제가 구 소유라는 이유로 비교적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신주쿠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판을 키우기 시작했다. 2011년까지 3년간 소책자를 만들고 행사를 열며 주민들 사이에 ‘우리 동네가 소세키를 배출한 곳’이라는 인식이 퍼지도록 분위기를 띄웠다. 2011년에는 공영주택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다. 2012년에는 ‘5년 후 개장’을 목표로 기념관 정비 검토 모임을 꾸렸다. 유족들, 지식인, 지역단체 대표 등이 모여 기념관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굳이 세금으로?”, “조용하던 동네가 시끄러워지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문제점보다 장점이 크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신주쿠구는 행정력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끈기 있게 구성원들의 마음을 사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10년의 준비 끝에 문을 열었다.
신주쿠구에 소세키산방기념관이 있다면 타이토구에는 일본 근대조각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아사쿠라 후미오를 기념하는 공간이 있고, 분쿄구에는 소설가·평론가·의사·군인이라는 ‘1인 4역’으로 알려진 모리 오가이를, 고토구에는 하이쿠의 일인자 마쓰오 바쇼를 기리는 공간이 있다. 모두 구립이다. 운영은 전문 재단에 맡기고, 입장료나 강좌실 대관으로 운영비 일부를 보조받기도 하며 기부금도 활용한다.
기업이라면 수익성을 따져야 한다. 공공기관이라면 구민의 자부심과 지역문화 활성화 같은 공익이 앞서야 한다. 도쿄에는 23개 구가 있고, 서울에는 25개 구가 있다. 국가가 할 일, 시가 할 일이 따로 있겠지만 어떤 일은 구가 앞장서야 한다. 그 지역에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문화예술인을 발굴해 기념관을 세우는 도쿄 23구의 모습에서 서울의 미래를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