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유혜원(31)씨는 친구들과 모이면 ‘치맥(치킨에 맥주)’이나 떡볶이에 무알코올 맥주를 할 뿐, 자청해서 와인을 마셔본 적은 없다. 유씨는 “회사에서도 회식 때 와인이냐 소맥이냐를 놓고 팀 동료들 수요 조사를 해보면 소맥이 훨씬 많다”면서 “와인을 곁들인 회식은 파트장님 ‘꼰대 말씀’이 길게 이어진 지루한 자리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미국 유타주에서 바텐더로 일한다는 33세 A씨는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가장 비싸고 좋은 맥주도 입문용 와인보다는 싸고, 고급 증류주조차 중상급 와인 한 병 가격이면 충분히 살 수 있다”며 자신이 와인에 빠져보려 했지만 실패한 이유를 설명했다.
7000년 역사의 와인 산업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국제와인기구(OIV)에 따르면 세계 와인 소비량이 2024년 약 215억 리터(ℓ)를 기록, 1961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2021년 반짝 증가했던 와인 소비량은 2022년부터 3년 내리 평균 3%씩 감소했다. 지난해 통계는 아직 발표 전이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2025년에도 낮은 소비 수준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께 먹는 사회’가 사라진다
사실 ‘무알코올 음료’를 제외하면 주종 가릴 것 없이 대체로 대부분의 술이 주춤하는 추세다. 주류 데이터 업체 IWSR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맥주·증류주 등 종류에 관계없이 대부분 술 소비량이 팬데믹 이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와인은 모든 가격대에서 판매가 감소하는 등 ‘구조적 감소세’에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다르다. 저가 와인 판매는 연간 2%씩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고급 와인의 성장세도 맥주나 증류주에 비해 느리다. 이는 와인 소비 감소가 단순한 음주에 대한 인식 변화가 아니라, 소비자들이 ‘천천히 함께 식사하는 문화’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임을 시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 세계 와인 총 소비량은 10년 새 11%나 줄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와인은 파티용 맥주나 즉흥적 소비가 많은 증류주와 달리, 소규모 모임·식사·대화와 결합된 술로, 공동 식사가 줄어드는 것이 와인 소비 위축으로 직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는 사회적 관계가 약화하는 세태가 반영된 트렌드라는 것이다. 마리옹 드모시에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이코노미스트에 “팬데믹 이후 학생들이 훨씬 더 고립됐다. 팀 스포츠 참가자는 줄고, 달리기나 사이클링 같은 개인 활동이 늘었다”며 “사회 전반에 단절이 나타나고 있다. 함께 사는 방식이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신인류의 등장은 와인 시장에 타격을 주고 있다. 의식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는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은 운동을 즐겨하고 술은 가급적 멀리하는데, 값이 아무리 싸다 해도 몇 모금 마시자고 와인 한 병을 선뜻 구매하는 건 부담스러워한다는 얘기다.
◇관세 인상도 타격
울고 싶은 와인 업계는 트럼프 관세 폭탄이라는 악재도 맞았다. 유럽산 와인은 지난해 8월부터 미국이 유럽연합(EU) 수입품에 부과한 15% 관세 영향권에 들어섰다. 와인거래소 리브엑스에 따르면 이 여파로 지난해 11월 말 기준 미국 소비자들의 고급 와인 구매액은 약 44% 감소했다. 2020년대 초반 110억 리터(ℓ)를 넘었던 세계 와인 교역량은 2024년 100억 리터 밑으로 줄어든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와인 업계가 처한 사정을 외교에도 십분 이용하고 있다. 최근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가자지구 분쟁 중재 기구인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에 프랑스가 합류를 거절하자,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에 200% 관세 부과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와인 수출액 최대국인 프랑스의 ‘아픈 곳’을 정확히 노렸다. 포브스지는 “점점 더 많은 소비자가 저가 와인을 찾거나 자신이 신뢰하는 생산자의 와인에 집중하는 ‘이중 시장 구조’가 굳어지면서, 중간 가격대 와인은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