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해 ‘프로젝트 크립토(Project Crypto)’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자산 및 금융 토큰화 규제의 큰 틀을 설계하기 위한 것으로, 블랙록, 코인베이스, 로빈후드, 팍소스 등 업계 대표 기업들이 참여하고 폴 앳킨스 SEC 위원장이 주도하는 워킹 그룹이다.
블록체인 기반 자산을 법 제도 안으로 포섭하려는 이 시도는 전통 금융과 크립토 업계의 협력을 통해 시장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다. 참여 기업들의 면면은 자못 흥미롭다. 규제 기관과 치열하게 대립해 온 코인베이스, 그리고 과거 규제 회피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로빈후드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이들이 머리를 맞댄 것은 전인미답의 혁신 앞에서 정부 관료들이 스스로 상상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험 기업들의 실무적 경험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뜻깊다.
이들이 논의하는 핵심 주제인 ‘자산 토큰화’는 채권, 주식, 부동산 같은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올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중개 기관 없이 즉시 정산이 가능해지고, 유동성이 낮은 자산의 분할과 유통이 쉬워진다. 특히 토큰화된 자산은 국경을 초월하므로 전 세계 금융 소외 계층의 접근성도 높아진다.
항공사 마일리지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의 시스템에선 마일리지 기록을 항공사가 독점하므로 사용자가 이를 임의로 처분하거나 양도하기 어렵다. 하지만 토큰화된 마일리지는 항공사 시스템을 벗어나 외부에서 이전될 수 있는 ‘점유물’의 성격을 갖게 된다. 로빈후드는 토큰화의 완성 단계를 ‘자산이 발행사나 규제 기관이 지정한 플랫폼을 벗어나 자유롭게 거래되는 단계’라고 정의한다.
다만 토큰화는 자산에 대한 발행 기업과 정부의 통제력을 제약하기 때문에 규제 당국으로선 반길 일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 규제 당국은 현 단계에서는 토큰화된 자산(STO)의 거래를 인가받은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제한적인 유통 구조로 관리하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토큰화의 기술적 본질과 충돌한다. 국경 없는 블록체인상에서 한국인이 외국 플랫폼을 통해 토큰화된 국내 자산을 거래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미디어 플랫폼 경쟁에서 뼈아픈 실책을 경험했다. 한국인은 이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국 콘텐츠조차 온전히 소비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였다. 금융이라고 해서 같은 길을 걷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 세계가 자산 토큰화라는 초고속 금융 인프라를 구축 중인데, 한국만 통제에 집착한다면 머지않아 한국인들이 로빈후드 앱을 통해 토큰화된 삼성전자 주식을 거래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