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회사에 돈을 댄 이들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때로 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투자에 임하는 이유는 그만큼 신약 개발 성공률이 극히 낮고 투자 비용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오혁신기구(Biotechnology Innovation Organization·BIO)에 따르면 임상 1상에 들어간 후보 물질 100개 중 단 8개만이 최종적으로 승인돼 시장에 나온다. 개발에는 평균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연구·개발 비용도 20억~30억달러 수준이 든다. 이렇게 어렵게 신약을 개발해도 짧은 독점 판매 기간 후 복제약이 쏟아지기에 회사들은 끊임없이 파이프라인(신약 후보 물질) 찾기에 골몰해야 한다.
과학의 탈을 쓴, 냉혹한 확률 게임에 다름 아니던 바이오 산업이 AI(인공지능) 기술을 만나면서 새로운 양상을 맞고 있다. AI 기술이 신약 개발과 임상 시험, 진단 전 과정에서 비용과 시간을 대폭 절감할 것으로 기대되면서 AI 기술을 가진 빅테크와 빅파마들의 합종연횡이 바삐 진행되고 있다.
◇생물학자와 AI 엔지니어, 한 실험실에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제약사 일라이 릴리가 세계 최대 빅테크인 엔비디아와 손잡은 것은 글로벌 제약 산업이 기술을 등에 업고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가는 신호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달 1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에서 두 회사는 향후 5년간 10억달러를 투입,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공동 연구소를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엔비디아의 AI 칩 ‘그레이스 블랙웰’ 1000개 이상을 활용한 수퍼컴퓨터를 구축해 AI 모델 훈련과 대규모 데이터 분석에 돌입한 릴리는 앞으로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칩 ‘베라 루빈’을 활용해 신약 개발에 본격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AI가 실험을 설계하고 실험을 실행해 데이터를 생성한 후 다시 AI 훈련으로 돌아가는 ‘순환 사이클’을 만든다는 것이다.
AI 회사를 인수한 곳도 등장했다.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암 신약 연구를 가속화하기 위해 미국 보스턴에 본사를 둔 AI 기업 ‘모델라AI’를 인수했다. 가비 라이아 모델라AI 최고영업책임자(CCO)는 13일 “암 신약 개발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데이터 집약적이며, 시간에 민감해지고 있다”며 “아스트라제네카에 합류함으로써 전 세계 임상시험과 실제 임상 환경에서 우리 회사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에도 대형 제약사들이 AI 기업과 협업한 사례는 많았지만, 이번 인수는 AI를 보조적 역할이 아닌 암 신약 연구의 핵심 엔진으로 등장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의료 산업의 최종 결정권자인 미국 식품의약국(FDA)도 지난해 자체 AI 도구인 ‘엘사’를 도입했다. LLM(대형 언어 모델)을 활용해 제출된 임상시험 계획서 평가와 이상 사례 요약, 라벨 비교 등 반복적인 규제 심사 업무를 효율화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과거 연설에서 “생물학과 컴퓨터 과학이 만나는 ‘디지털 생물학’이 역사상 가장 큰 혁명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디지털 생물학은 틈새 분야가 아닌 폭발하는 차세대 신산업”이라고 내다봤다.
◇‘AI 병원’도 등장하나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 일본은 환자뿐만 아니라 의료 인력까지 초고령화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AI 병원 이니셔티브’도 추진한다. 히타치, IBM 재팬, 소프트뱅크 등 기업들이 참여하고 정부가 5년간 1000억달러(약 147조원) 투자하는 민관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영상 진단과 맞춤형 진료 등에 AI 기술을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정부가 선정하는 10개 대표 AI 병원에서는 영상 판독, 병리 분석, 전자의무기록 작성 등 의료진의 반복 업무를 AI가 보조할 예정이다. CT·MRI 영상 판독의 경우 AI가 먼저 이상 부위를 표시해 의사의 판단을 돕고, 진료 기록 작성과 보험 청구에 필요한 문서 작업도 자동화한다. 의료진은 환자 진료와 의사 결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되는 구조다. 일본 정부는 이런 ‘AI 병원 모델’을 통해 의료의 질을 유지하면서도 고령화로 인한 인력 부족 문제를 완화하겠다는 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