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에 불쑥 찾아온 AI(인공지능)는 그동안 상상에 그쳤던 ‘일자리 침식’ 우려를 현실의 문제로 가져왔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생산성이 하위권에 머무는 한국에서 AI는 더욱 달갑지 않은 존재다. 낮은 생산성 구조에서는 자동화에 따른 인력 대체 압력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인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가짜 노동’의 저자인 데니스 뇌르마르크도 최근 WEEKLY BIZ 인터뷰에서 “장시간 노동, 강한 위계문화 등 과거 한국을 선진국 경제로 탈바꿈시킨 가치들이 앞으로도 동일한 효과를 낼 것이라 믿는다면 큰 오산”이라며 “오늘날 혁신을 이끄는 힘은 독립적으로 사고(思考)하고 아이디어를 확산·발전시키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가 현대 사회의 번아웃 증후군과 과로사의 범인으로 지목한 ‘가짜 노동’은 실질적 성과와 관련없이 그저 바쁘게 보이며 시간만 허비하는 일을 뜻한다.
WEEKLY BIZ는 뇌르마르크와의 인터뷰를 통해 AI 시대에 노동과 조직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짚어봤다.
◇“AI 기술, 쓸모없는 일 양산할 수도”
-AI와 자동화 확산이 대규모 실직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AI가 대량 실업을 초래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직업은 거의 없었다. 일의 형태가 바뀌고 일부는 더 쉬워질 뿐이며, 사람들은 반대로 새로운 업무를 더 많이 떠안게 된다. 컴퓨터 등장 이후 세무·회계 등에서 효율화가 예상됐지만 행정 인력은 오히려 늘었다. 기술 발전으로 생긴 여유를 가치가 낮은 ‘가짜 노동’이 채웠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AI 혁명도 일부 업무를 없애는 대신 그 빈자리를 또 다른 형태의 가짜 노동으로 메우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AI 혁명은 어떻게 가짜 노동을 만들어내나.
“AI끼리 가짜 노동을 만들어내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난다. 누군가는 AI로 보고서를 만들고, 받는 쪽은 읽지 않으니 또 다른 AI가 요약하는 식이다. 불필요한 ‘중간 업무’가 생기는 것이다. 일을 수행하는 주체만 컴퓨터일 뿐, 가짜 노동은 그대로다. 애초에 긴 보고서를 왜 만드는지 자체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AI 도입이 ‘보여주기식 혁신’에 그치는 경우와 실제로 업무 부담을 줄이는 경우를 가르는 요인은 뭔가.
“관건은 기술을 ‘쓸모없는 일을 없애는 데’ 쓰는가, 아니면 ‘쓸모없는 일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데’ 쓰는가에 있다. 기술은 단기적으로 과대평가되고 장기적으로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AI와 로봇을 모든 곳에 적용하려는 분위기다. 남들이 앞서간다는 인식이 과도한 도입을 필요가 없는 업무를 자동화하려는 기업들을 여러 곳 봤다. 예전에는 이를 ‘프로세스 자동화’라 불렀지만, 실제로는 그 프로세스를 없애는 것이 더 나은 해법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송장을 발행할 때마다 고객들에게 자동으로 이를 전송하는 업체가 있다. 그러나 정작 송장 정보가 필요 없는 고객이 대부분이다. 자동화 기술이 애초 불필요한 알림을 양산해 여러 사람들에게 쏟아내는 셈이다.”
◇“직원 믿고 더 많은 자율권 부여해야”
-기업 경영진은 조직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업무 시간보다 산출물을 봐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 노동 시간이 길면 생산성도 덩달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지식 노동에서 시간과 가치는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산성이 높은 나라일수록 노동 시간이 짧다. 주어진 시간이 같으면 일은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늘어난다. 그래서 경영진은 직원들의 업무를 더 면밀히 들여다보고, 더 겸손하게 조직을 바라봐야 한다. 위계가 강한 조직일수록 유사 업무가 쌓인다. 현장에서 문제를 찾은 직원에게 권한을 줘 스스로 해결하게 하면, 유사 업무는 줄고 직원은 더 유능해진다.”
-조직 구조 개선에 성공한 사례가 있나.
“넷플릭스는 직원에게 과감히 자율성을 주는 방식으로 불필요한 규칙·보고 체계가 끝없이 만들어지는 악순환을 차단했다. 스웨덴 대형 은행인 한델스방켄도 중앙집중 구조에서 벗어나 지점 단위에 높은 권한을 부여해 단순한 조직 모델을 만들었다. 내가 일한 덴마크 최대 샌드위치 체인 ‘선셋 블러바드’ 역시 유사 업무를 제거해 주 4일제를 도입했다. 공통점은 비전 있는 리더가 복잡한 구조나 경영 언어에 매료되지 않고 조직을 단순하게 유지하며 직원들을 신뢰한다는 점이다. 그런 조직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성장하고 성과도 커진다.”
-AI와 자동화가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까.
“예전에 한 매체에서 소개된 사례가 있다. 어느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업무 대부분을 자동화했지만, 이를 공개하면 더 많은 업무가 주어질까 두려워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그가 만든 자동화 프로그램은 동료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었지만, 잘못 설계된 인센티브가 공유를 막은 셈이다. 자동화로 생긴 성과가 직원의 노동시간 단축으로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기술을 수용할 것이다. 반대로 그 이익이 업무 부담 증가나 조직 상층부의 이익으로만 귀결된다면 받아들일 리 없다. 나는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AI는 노동시간을 줄일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AI·반도체 경쟁력 강화? 노동시간 아닌 조직 설계가 핵심"
-한국은 고학력이 필요 없는 직무에서도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학력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하다.
“AI는 과잉 학력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다. 지금까지 자동화는 주로 육체노동을 대체해 왔지만, AI는 사람들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 노동의 영역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저평가되던 숙련 기능직과 현장 서비스업의 가치는 재조명될 것이다. 반면 전통적 고학력 직업군은 현재의 임금 프리미엄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교육에는 이미 ‘버블’이 형성돼 있으며, 언젠가는 조정이 불가피할 수 있다.”
-한국 국회가 반도체특별법 발의 과정에서 R&D 인력을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해, 국가 경쟁력 저하 우려가 나온다.
“그런 우려는 이해하지만, R&D 같은 지식 기반 업무는 시간을 더 투입한다고 혁신이나 생산성이 늘지 않는다. 고연봉 전문직을 규제에서 제외하면 일은 주어진 시간만큼 계속 불어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실제 산출은 그대로인데 유사 업무와 보고·관리 업무만 더해지는 것이다. 한국이 AI·반도체 경쟁력을 높이려면 핵심은 노동시간이 아니라 조직 설계다. 관료주의를 줄이고 자율성을 높이며 산출 중심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24시간 개발이 필요하다면 개인에게 70~80시간을 강요할 필요 없이 교대조나 팀 단위 운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가짜 노동(Pseudowork)
겉으로 보기에는 실제 업무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정작 그 결과물은 무의미하거나 가치를 거의 창출하지 못하는 일을 뜻한다. 이 말을 만든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가짜 노동이 개인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번아웃 증후군 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