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력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한 중소기업이 있다. 대기업을 주요 고객사로 확보했고, 지난 3년 동안 매출과 영업이익은 꾸준히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이사회와 주주들은 재무제표를 보며 “안정적으로 성장 중”이라고 평가한다. 지표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우량 기업이다. 그런데 매월 25일, 급여일을 앞둔 경영진의 체감은 다르다. 장부상 이익은 역대 최대 수준인데, 정작 통장 잔고가 불안하다. 자금 담당자는 단기 차입 한도를 다시 확인하고, 예정된 수금 일정을 몇 번이고 들여다본다. 직원들 입장에선 선뜻 이해가 어렵다. “회사가 흑자인데 왜 급여 지급을 걱정하지?”
이런 상황을 두고 “비용을 방만하게 쓴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 쉽다. 이익이 난 만큼 현금이 쌓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어디론가 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 현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흑자 도산’의 원인은 비용 통제보다 자금의 흐름, 즉 타이밍인 경우가 많다.
핵심은 ‘회계’와 ‘현금’ 사이의 시차다. 손익계산서는 발생주의(외상 매출처럼 현금이 오가지 않아도 경제적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기록)를 따른다. 물건을 납품하고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면, 대금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도 매출과 이익이 잡힌다. 반면 급여와 임대료, 원자재 대금 등은 현금주의(돈을 실제로 주거나 받을 때 회계 장부에 기록)에 가깝다. 장부가 아니라 통장 잔고가 있어야 결제가 이뤄진다. 이익이라는 약속과 현금이라는 실제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는 순간, 흑자기업도 불안해진다.
특히 대기업을 고객으로 둔 B2B(기업 간 거래) 기업에선 이런 문제가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현장에서는 ‘일은 끝났는데 청구가 멈추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납품과 검수가 끝났음에도 고객사의 예산 집행 시기, 내부 결재 지연, 까다로운 증빙 요구 탓에 정산 확정과 청구가 미뤄진다. 중소기업에게 “예산이 확정되지 않아 청구를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통보는 단순한 행정 지연이 아니라, 자금 계획 전체를 수정해야 하는 중대 변수다. 더 큰 문제는 지급 지연이 단순히 현금 흐름을 늦추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자금 조달 능력 자체를 훼손한다는 점이다. 스위스 응용과학대 오르쿤 카야 교수는 2024년 연구에서 유럽 중소기업 데이터를 분석하며 이 위험을 경고했다. 연구에 따르면 기업의 현금 흐름 예측이 불확실해질수록 은행은 이를 ‘리스크’로 인식해 대출을 거절하거나 한도를 축소하고 더 높은 이자율을 부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어차피 받을 돈”이라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금융기관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가 성장할수록 자금 압박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 매출이 증가하면 그만큼 매출채권(외상값)과 재고가 쌓이기 때문이다. 납품을 위해 인력을 더 뽑고 원자재를 미리 구매했지만, 대금 회수는 한참 뒤에 이뤄지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자금 흐름이 막히면 경영진은 흔히 “허리띠를 졸라매자”며 비용 절감부터 외친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는 단순히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일 수 있다. 영업 성과를 단순히 ‘매출 수주액’이 아니라 ‘현금 회수’와 연결해 바라봐야 한다. 많이 파는 것만큼 제때 돈이 들어오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조직에 심어줄 필요가 있다.
따라서 경영진은 매출과 이익의 ‘확정성’을 더 보수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단순히 납품을 마쳤다고 해서 곧바로 현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청구 가능성’이 확보돼야 비로소 자금 회수를 예측할 수 있다. 고객사 시스템에 청구서를 접수할 수 있는 요건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았다면, 장부상 매출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흑자 기업의 진짜 질문은 “우리 회사가 좋은 회사인가, 나쁜 회사인가”가 아니라 “우리 회사의 피, 즉 현금이 제대로 돌고 있는가”에서 시작돼야 한다. 1월 경영 회의에선 으레 전년도 결산 실적을 점검하곤 한다. 이때 매출 및 이익 목표 달성 여부와 함께 다음 질문 하나를 추가해 보자. 이것만으로도 회의의 공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전년도 말 기준, 즉시 청구 가능한 금액과 확정된 입금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