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주가수익비율(PER)과 각종 밸류에이션 지표가 향후 주가를 좌우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현재 글로벌 주가수익비율이 높다는 사실이 공포와 비관론을 자극하고 있고, 이는 저평가된 한국 증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밸류에이션은 주가의 방향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 적도 없었다. 높은 주가수익비율이 어떤 신호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항상 주가수익비율이나 내가 40여 년 전에 만든 지표인 주가매출비율(PSR·시가총액을 매출액으로 나눈 값) 같은 수치를 주식시장의 ‘타이밍 도구’라고 말한다. 수치가 낮으면 ‘싸다’는 의미이니 저점에서 사야 하고, 수치가 높으면 거품이므로 고점에서 팔아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잘못됐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한국 지수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주가수익비율이 주가 흐름을 설명해 주는 힘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2004년 이후 한국 증시에서 연초 주가수익비율(이전 12개월 수익 활용)로 향후 1년 수익률을 설명할 수 있는 비율은 고작 1%에 불과했다. 기간을 늘려 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연초 주가수익비율로 설명할 수 있는 비율은 향후 3년 수익률에서 약 3%, 5년 수익률에서 10% 남짓에 그쳤다.
글로벌 시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 달러 기준의 MSCI 세계 지수를 보면, 1970년 이후 주가수익비율이 향후 1·3·5년 수익률을 설명하는 비율은 각각 8%, 18%, 26% 수준이었다. 가장 설명력이 높았던 경우조차도 향후 5년 수익률의 4분의 3 정도는 주가수익비율과 무관하게 움직였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밸류에이션이 이미 널리 알려져 가격에 선(先)반영됐기 때문이다. 또한 주가는 미래를 보지만 실적은 과거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2009년 세계 증시는 경기 침체 이후의 회복을 예견하며 급등했지만, 수익은 침체의 충격에서 회복되지 않았다. MSCI 세계 지수의 주가수익비율은 30배에 근접했지만, 결과적으론 역사적으로 좋은 매수 기회였다.
물론 높은 주가수익비율 뒤에 부진한 수익률이 나타난 적도 있다. 2000년 세계 증시는 주가수익비율이 36배에서 출발해 향후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4%였다. 반례도 많다. 2021년 세계 증시는 주가수익비율이 28배에서 출발했음에도 33% 상승했는데, 이는 현재의 24배보다도 높은 수치다. 한국 증시 역시 2010년 주가수익비율이 33배로 시작했지만, 그해 24% 상승하며 글로벌 증시를 능가했다. 2009~2025년 사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글로벌과 미국 증시는 높은 주가수익비율을 유지했지만, 지난달까지 상승률은 각각 665%와 1018%에 달했다.
밸류에이션은 가치주 종목을 고를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장 전반의 방향을 판단하는 데엔 적합하지 않다. 높은 주가수익비율에 대한 공포는 잘못된 것이고, 잘못된 공포는 기대치를 낮춰 주가 상승을 촉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