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신(財神)님, 언제쯤 제 편에 서 주실 건가요?”
비 오는 어느 날 밤, 야근을 마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던 여자 주인공 쉬안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푸념한다. 성실하게 일해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하는 건 직장인 쉬안러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이다. 그 순간, 길 한복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스박스 하나가 눈에 띈다. 상자를 열자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 고양이의 정체는 뜻밖에도 빼어난 외모의 남자로 변신하는 재물신. 그날 이후 쉬안러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행운이 연달아 찾아오기 시작한다.
다소 급작스러운 전개에 고개가 갸웃해질 수 있지만, 이는 현재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마이크로 드라마 ‘우리 집에 재물신 고양이가 왔다’의 실제 장면이다. 마이크로 드라마는 에피소드 한 편이 2분 남짓한 초단편 형식의 드라마를 뜻한다. 최근 이 같은 드라마가 중국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올해 중국 마이크로 드라마 시장 규모는 약 900억위안(약 18조900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78% 성장했다. 이는 올해 극장가 매출(약 500억위안)의 두 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열풍은 중국에서만 부는 게 아니다. 해외 시장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감지된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마이크로 드라마 플랫폼 ‘릴쇼츠(ReelShorts)’가 앱스토어 다운로드 순위에서 넷플릭스를 제치기도 했다. WEEKLY BIZ는 글로벌 시장까지 넘보는 중국의 마이크로 드라마 열풍 현상을 들여다봤다.
◇숏폼 익숙한 젊은 층 겨냥
마이크로 드라마는 중국의 숏폼 콘텐츠 플랫폼인 도우인과 넷플릭스를 결합한 형태로 스마트폰 세대를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특히 모바일 기기에서 틱톡 영상을 쓸어넘기듯 각 에피소드를 연달아 시청할 수 있다는 점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스마트폰 화면 비율에 맞게 제작된 각 에피소드의 분량은 길어야 1~2분 수준이다. 보통 한 작품이 수십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초단편 서사는 일종의 ‘콘텐츠 패스트푸드’처럼 소비된다. 집에서 긴 시간을 들여 드라마를 볼 여유가 없는 젊은 직장인들의 수요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시사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마이크로 드라마 플랫폼들이 초반 에피소드를 무료로 제공해 시청자를 유인한 뒤, 이후 회차에 대해 10달러가 넘는 비용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젊은 직장인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고 전했다.
짧은 분량은 제작사에도 유리하다.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기존 드라마와 달리, 마이크로 드라마는 55편 분량의 에피소드를 단 나흘 만에 촬영할 수 있다는 게 외신들 보도다. 중국 제작사들은 올해 1~8월에만 약 4만편의 에피소드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콘텐츠 공급이 급증하면서 이용자 수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산하 중국인터넷정보센터(CNNIC)에 따르면 지난해 6월 5억7600만명이던 마이크로 드라마 플랫폼의 월간 이용자 수는 불과 6개월 만에 6억6200만명으로 약 15% 증가했다.
◇부·권력 향한 갈망이 동력
중국에서 인기를 끄는 대부분의 마이크로 드라마는 신분 상승이나 복수를 중심으로 한 서사를 담고 있다. 중국에서 ‘카밀 라오’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인 시나리오 작가는 로이터에 “(마이크로 드라마는) 밑바닥 신분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상류층이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며 “억만장자가 된 주인공이 과거에 자신을 멸시했던 이들에게 앙갚음을 하게 되는 식”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가난한 여주인공과 차가운 재벌 회장의 만남’이나 ‘배신당한 연인의 치밀한 복수’ 같은 소재가 대표적이다. 환생이나 정략결혼 로맨스 등과 같은 소재도 자주 등장한다. 시장에서는 “소프오페라(일일 연속극)에 스테로이드를 주사한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서사가 주목받는 배경으로, 중국 사회에서 계층 이동의 문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현실을 꼽는다. 장난대 중문학 부교수인 쉬팅은 “많은 이가 사회적 계층 이동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여긴다”며 “권력과 부를 향한 갈망이 억만장자를 소재로 한 이야기의 수요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분 상승의 서사를 담은 드라마가 대중의 욕구를 대리 충족해주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셈이다.
◇中 정부, 전폭적 지원
자극적인 소재의 마이크로 드라마가 사회주의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검열에 나섰던 중국 정부도 최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장 잠재력을 의식해 태도를 바꾸고 있다. 앞서 중국 국가광전총국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 급격하게 확산하던 마이크로 드라마를 “음란하고 폭력적이며 저속하고 천박한 콘텐츠”로 규정하며 2만5300편에 대해 삭제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돌연 입장을 바꿔 지난 8월 드라마 회차를 40회로 제한하던 규정을 폐지하고, 콘텐츠 심사 절차도 대폭 간소화했다. 일부 지방정부도 드라마 제작사에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거나 스튜디오에 직접 투자하는 등 전폭적 지원에 나섰다.
정부 지원에 힘입어 중국 플랫폼들은 해외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예컨대 릴쇼트와 드라마박스는 중국 드라마를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 배우·작가·감독 등을 고용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현지화 전략으로 글로벌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데이터 업체 아이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중국 마이크로 드라마 앱은 해외에서 지난해 2월까지 누적 다운로드 수 약 5500만건, 매출 1억7000만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