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키요에 대표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9세기). 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센 파도가 치는 가운데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보입니다. /미 의회도서관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무인시대’는 2000년대를 전후해 제작된 대하드라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었지만 30% 안팎의 시청률 덕에 수지타산을 맞추는 게 어렵지 않았다. 12부작이나 16부작이 대세인 요즘엔 더 이상 보기 힘든 풍경이다. 일본에선 1963년부터 NHK 대하드라마가 방영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카모토 료마 등 전국시대와 메이지 유신기의 인물을 앞세워 한때 시청률 30%를 넘기기도 했지만, 볼거리가 많아지고 긴 호흡의 작품을 꺼리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요즘엔 10% 초반에 그친다. 올해는 ‘에도 시대의 미디어 왕’이라 불린 쓰타야 주자부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미디어 왕이라 표현했지만 루퍼트 머독처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신문, TV, 케이블, 영화를 아우르는 글로벌 미디어 제국을 만든 인물은 아니다. 주로 도쿄 일대를 중심으로 서적과 우키요에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럼에도 우키요에 화가를 키웠다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우키요에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일본에서 유행했던 풍속화로 목판화가 많다. 거대한 파도가 치솟고 그 아래로 배 두 척이 출렁이는데, 저 멀리 고요한 후지산이 보이는 호쿠사이의 걸작 ‘후지 36경: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일본에선 우키요에 6인방으로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 샤라쿠, 쿠니요시, 쿠니사다를 꼽는다. 이 중 우타마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인물이 쓰타야였다. 당시 우키요에 시장은 출판업자 중심 구조였다. 작가가 아무리 천재여도 출판업자가 작품을 내보내지 않으면 시장에 도달할 수도, 명성을 쌓을 수도 없었다. 쓰타야는 향후 어떤 트렌드가 우키요에 시장을 주도할지 예측하고 그 특성에 맞는 그림을 그려 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했다. 원화에는 최고급 재료를 쓰고, 이를 판화 원본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탁월한 역량을 지닌 조각가를 붙였다. 인쇄 공정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찍혀 나온 판화의 품질이 예사롭지 않다. 원본 느낌이 그대로 살아난다. 화가의 명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샤라쿠도 쓰타야가 키운 것과 마찬가지다. 생몰연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는 샤라쿠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쓰타야 출판물이었다. 올 봄 도쿄국립박물관이 개최한 ‘콘텐츠 비즈니스의 풍운아: 쓰타야 주자부로’ 전시에 우타마로와 샤라쿠의 대표작이 등장한 이유다.

모든 일에는 외부에 드러나 있는 사람보다 숨어 있는 사람의 역량이 중요하다. 아만 리조트를 창립한 아드리안 제차의 말이 떠오른다. “명백하게 소설을 쓰는 건 작가죠. 그렇지만 소설이 생명력을 얻으려면 에디터가 필요합니다. 제 역할은 에디터예요. 명예는 작가에게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 아만에서는 건축가가 작가입니다.”

화가와 컬렉터의 관계도 그렇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면 발터-기욤 컬렉션이란 상설 전시실이 있다.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젊은 천재 화상 기욤을 첫 번째 남편으로, 유명 외과의사이자 재력가인 발터를 두 번째 남편으로 둔 여성이 컬렉션을 프랑스에 기증하면서 탄생했다. 인상파와 현대 미술 거장들을 발견하고 후원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들이 자리 잡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와 에디터, 아티스트와 프로듀서, 그리고 화가와 컬렉터. 세상은 재능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 재능을 볼 줄 아는 안목, 그리고 이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상품 기획력과 자본, 이들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K팝, K푸드, K엔터테인먼트를 넘어 K컬처가 대세다. 외국에 나가서 한국말을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한마디 더 배우려 하는 그 나라 사람을 보면 뿌듯해진다. 이 대세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당장의 수익보다는 지속성에 힘을 실은 시스템이 구축되길 기대해 본다.

신현암 팩토리8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