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퍼블리싱

“10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에는 바이오 산업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가 중국에서 신약 후보를 찾고 있습니다.”

미국 자산운용사 론카인베스트먼트의 브래드 론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과거 제너릭(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합성의약품의 복제약) 생산에 그쳤던 중국이 이제는 바이오 연구의 허브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 정부는 2010년대 중반부터 자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에 파격적 지원을 해왔다. 막대한 자금 조달은 물론 임상시험 승인 절차도 대폭 간소화해 속도를 높였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임상시험(132건)을 진행한 항서제약 같은 기업이 중국에서 나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중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신약 개발의 메카로 부상하며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중국 의약품 통계 플랫폼 팜큐브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1~8월 총 93건의 해외 기술 수출(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 규모만 850억달러(약 125조원)에 달한다. 이에 홍콩거래소에 상장된 대표 생명공학 기업 최대 50사를 묶은 ‘항셍바이오테크 지수’도 지난 10월 8일 1만8281.20을 기록, 올 1월(8364.26) 대비 119% 가까이 뛰었다. WEEKLY BIZ는 중국이 신약 개발의 선두권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했다.

◇‘패스트 팔로워’ 경험, 신약 개발에 날개

중국 바이오 업계는 오랫동안 기존 약의 효능과 안전성이나 투여 방식을 개선하는데 집중하는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 전략을 구사해왔다. 이 과정에서 누적된 경험들은 지금의 ‘퍼스트 인 클래스(First-in-Class·새로운 작용 기전을 도입한 세계 최초의 신약)’ 개발 중심으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됐다. 지난해 칭화대의 한 연구팀이 국제 학술지 네이처 리뷰 드럭 디스커버리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 바이오 업계의 신약 개발 프로젝트 가운데 40% 이상이 패스트 팔로어 및 퍼스트 인 클래스 치료제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동안 제너릭 개발에 주력해 온 중국 바이오 업계가 이제 글로벌 빅파마의 혁신 수준에 근접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이 미국·유럽과 비교해 신약을 대규모로 훨씬 빠르게 시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는 점도 혁신을 앞당긴 요인이 됐다. 우선 인구가 많아 임상 환자 모집이 빠르고, 대규모 임상시험 인프라 시설이 속도전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전체 신약 개발 단계 중 진행 속도가 가장 느린 임상 시험에서 중국은 미국·유럽보다 평균 1~2년 먼저 결과를 확인한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이런 속도전은 특히 ‘항체·약물 접합체(ADC)’ 개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ADC는 유도 미사일처럼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차세대 표적 항암제다.

◇수익성 낮은 내수 시장…해외로 눈 돌려

자국 시장의 낮은 수익성도 중국 바이오 기업들이 해외 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큰 의약품 시장이지만,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수익을 내기 쉽지 않은 구조다. 중국은 국가 주도로 각 병원의 의약품 수요를 묶어 제약사들에 가격 입찰 경쟁을 강제한다. 당국이 약값을 통제하는 셈이다. 제약사는 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가격을 절반 이상 낮춰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의 처방약 매출 규모는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에 따르면, 2023년 중국 처방약 매출은 약 1250억달러로 미국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매출 대부분을 제네릭이 차지하고 있고, 신약의 매출 비율은 약 20%에 그쳤다.

이에 중국 바이오 업계는 서방 기업과의 라이선스 아웃 계약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라이선스 아웃은 개발한 신약 후보 물질의 판매권을 상대 기업에 이전하고, 그 대가로 계약금·마일스톤(단계별 성과금)·로열티를 받는 방식을 뜻한다. 글로벌 기술 수출 경험이 풍부해 중국 바이오 업계의 풍향계로 불리는 항서제약은 최근 독일 제약사 머크를 비롯해 미 신생 기업 브레이브하트 바이오, 인도 글렌마크 등과 연이어 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맺었다. 지난 7월에는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과 호흡기·면역학 및 염증·종양학 분야에서 최대 12개의 신약을 공동 개발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또한 중국 제약사들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덜기 위해 미국 등 해외에 별도 법인을 설립하는 ‘뉴코(New Co·새로운 회사)’ 모델을 활용, 글로벌 시장 경쟁력도 강화하고 있다.

◇빅파마의 ‘특허 절벽’도 호재

글로벌 빅파마가 주요 오리지널 의약품에 대한 특허 절벽(특허권 대거 만료)을 앞두고 있다는 점도 중국 바이오 업계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포시가(아스트라제네카의 당뇨병 치료제)와 입랜스(화이자의 항암제) 등 핵심 의약품에 대한 특허권이 향후 5년 내 차례대로 만료되면서 약 3000억달러가 넘는 매출 감소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빅파마들은 매출 급감 위기에 놓이자, 미·중 무역 갈등 속에서도 신약 개발을 위해 중국 바이오 업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예컨대 미 대형 제약사인 화이자는 지난 5월 중국 바이오 기업인 3S바이오와 차세대 항암제 개발을 위한 12억5000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화이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1억달러어치의 3S바이오 주식도 사들였다. 아스트라제네카 역시 최근 인공지능(AI) 기반 신약 개발을 위해 중국 CSPC제약그룹에 53억달러를 투자했다. 톰 바샤 뱅크오브아메리카 아시아태평양 인수·합병(M&A) 총괄은 블룸버그에 “(글로벌 빅파마가) 차세대 혁신 자산(신약 후보 물질)을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