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마니아들 사이 “평냉의 생명은 육수”라는 말이 나오는 건 결국 평냉의 본질이 슴슴하고 깔끔한 육수에 있다는 뜻이다. 평냉을 즐기는 사람들 중 냉면 그릇이 나오면 면은 건드리지도 않고 먼저 육수를 들이켜 본 뒤, 곧바로 “육수 좀 더 주세요”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처음 가 본 냉면집이라도 육수 맛만 보고 “아, 이 집 주방장, 어느 계열이겠네”하고 단번에 짚어내는 손님도 있다.
한국에 육수가 있다면 일본에는 다시(出汁)가 있다. 다시마와 가쓰오부시 등을 우려 만든 기본 국물이다. 일본에는 다양한 다시 전문점이 있는데, 1871년에 문을 연 ‘다시 오쿠메’는 손님이 원하는 재료를 골라 직접 조합하는 ‘맞춤형 다시 팩’으로 유명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가쓰오부시, 멸치, 다시마, 표고버섯 등 일본산 원료 36종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각 재료의 향을 맡아보며 고를 수 있어 “다시마에도 이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구나” “멸치 종류에 따라 맛이 이렇게 달라지네”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손님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재료를 원하는 만큼 골라 조합을 정하고, 가게는 그 자리에서 맞춤형 다시 팩을 만들어 포장해 준다. 듣기에는 근사한 서비스지만 ‘다시’를 잘 모르는 손님은 결국 구매를 포기하고 만다. 36가지 재료 가운데 무엇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도무지 결정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선택지가 너무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고를지 몰라 느끼는 이 부담을 흔히 ‘선택의 고통’이라 부른다.
‘쉬나의 선택 실험실’의 저자인 쉬나 아이엔거 컬럼비아대 경영학과 교수는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고객의 전문성 수준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차’를 보러 온 사람, ‘스포츠카’를 찾는 사람, ‘페라리 12기통’을 딱 집어 말하는 사람은 원하는 정보도, 결정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고객의 선호가 구체적일수록 선택이 쉬워지고, 구매 확률도 높아진다. 그는 이런 차이를 고려해 선택지를 제시하고 질문을 던지며, 기준을 만들어 주는 과정을 ‘선택 설계’의 핵심으로 본다.
다시 오쿠메 매장은 이 ‘선택 설계’를 잘 구현하고 있는 사례다. 개인 선호가 뚜렷한 사람은 자기가 선호하는 원료를 스스로 조합하면 되고, 가게는 그 선택을 그대로 포장해 팔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뭘 골라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망설이는 손님에게는 매장 내 ‘다시 소믈리에’가 나선다. 손님의 출신 지역, 평소 요리 스타일, 다시를 사용할 요리를 하나하나 물어보며 그에게 어울릴 만한 조합을 제안한다. 말로 설명해도 잘 감이 오지 않고, 요리 경험도 거의 없지만 선물용으로 사려는 손님에게는 또 다른 장치를 준비해 두었다.
이곳에서는 다시 오쿠메가 추천하는 ‘기본 다시’를 작은 종이컵에 담아 맛볼 수 있다. 오뎅 국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맛이다. 이 종이컵으로 보온병에 담아 둔 네 가지 다른 다시를 차례로 맛볼 수 있다. ‘상급 다시’는 맛의 여운이 깊고, ‘야채 다시’는 간이 세지 않으면서도 담백하다. ‘도쿄 다시’와 ‘교토 다시’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손님은 이 가운데 자기 입맛에 가장 맞는 다시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복잡한 조합을 계산하는 수고 없이도 ‘선택의 고통’에서 비교적 가볍게 벗어날 수 있는 장치다.
어떤 산업이든 방문 고객을 ‘구경만 하는 사람’에서 ‘구매 의향 고객’, 다시 ‘실제 구매 고객’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많다. 선택지가 많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객의 전문성 수준에 따라 정보를 다르게 제시하고, 판단 기준을 만들어 주고, 때로는 기본값을 제안해 주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오쿠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