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10% 오르면 보통 사람들의 구매력은 10% 줄게 됩니다. 똑같은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신이 자산가라면 물가가 20%씩 올라도 체감을 못 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물가와 함께 뛰고,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해 금리가 높아지면) 이자 소득도 불어날 테니까요. 인플레이션의 승자와 패자는 이렇게 갈립니다.”
글로벌 거시경제 분야 석학인 마크 블라이스 브라운대 국제정치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5일 WEEKLY BIZ와 화상으로 만나 이렇게 말했다. 최근 주요국에서 높은 인플레이션이 국가 경제의 ‘만성 질환’으로 자리 잡으면서 기업과 개인을 불문하고 다양한 경제 주체가 고통을 호소한다. 블라이스 교수는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수혜자와 피해자가 따로 있다”고 지적했다. 블라이스 교수는 이처럼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존 통념을 뒤엎는 ‘인플레이션의 습격’이란 신작을 12일 발간했다.
◇인플레이션, 모두의 고통?
-인플레이션은 마냥 나쁜 현상인가.
“인플레이션 수준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경제 성장과 조화롭게 발맞춘 물가 상승은 ‘좋은 인플레이션’이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연 2%의 물가 상승률을 목표로 잡았다. 반면 경제 성장보다 물가 상승이 빠른 ‘나쁜 인플레이션’은 실질 구매력을 떨어뜨린다. 같은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해졌는데, 소득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근로소득에 의존하는 사람인데 월급은 안 오르고 물가만 10% 올랐다고 가정하면, 구매력은 10%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근로 소득자의 피해가 더 크다는 말인가.
“그렇다. 당신이 만약 유기농만 취급하는 고급 식료품점에서 장을 보는 자산가라면 물가가 20% 뛰어도 체감을 못 할 수도 있다. 자산 가치가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구매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가가 오르면 중앙은행은 이를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린다. 금리가 높아지면 이자 부담이 커지는데, 신용 등급이 낮은 사람일수록 대출 이자율이 높기 때문에 타격이 크다. 반면 금융 자산(은행 예금 등)이 많은 자산가는 이자율이 높아지면 오히려 자본 소득이 늘어난다. 흔히 말하는 ‘모두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다’는 주장은 잘못됐다.”
◇돈방석 앉는 석유 기업과 은행
-자산가 외에 인플레이션으로 이득 보는 집단은.
“에너지 기업이 대표적이다.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오르면 에너지 기업 매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실제로 팬데믹발(發) 인플레이션 당시 산유국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전 세계가 치솟는 물가에 허덕일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축구 리그를 만들고, 수억 달러를 들여 호날두와 네이마르 같은 세계적 축구 스타들을 영입하지 않았나. 석유 기업 수준은 아니지만 은행도 인플레이션의 수혜를 입는다.”
-은행은 어떻게 이익을 보나.
“물가를 잡기 위해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2%에서 6%로 올렸다고 가정해보자. (시중은행의 초반) 예금 금리는 2%에서 찔끔 올렸을 경우가 많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은행은 예금자들에게 이자를 많이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물론 은행은 고객 예금뿐 아니라 유보 자금과 국제 금융시장에서의 차입금 등 다양한 자금을 운용한다. 그럼에도 금리 인상은 은행에 일종의 ‘뜻밖의 수확(windfall)’이 된다. 과수원을 지나가고 있는데 바람(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서 사과(이자 수익)가 떨어진 격이다.”
◇인플레이션, 화폐적 현상인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요인은 뭐라고 보나.
“전통적인 설명은 ‘많은 돈이 적은 물건으로 몰려갈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도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인플레이션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가령 독일의 높은 인플레이션은 러시아를 통해 들어오던 천연가스가 끊기면서 나타났다. 화폐가 아닌 공급의 문제였던 셈이다. 1970년대 미국의 경우도 보자. 베트남전쟁에 수백만명이 동원되면서 노동 가능 인구가 빠져나갔다. 노동력 부족은 임금 상승을 초래했고, 연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더구나 두 차례 석유 파동(1974·1979년)으로 유가가 치솟았다. 당시 인플레이션 역시 화폐 유통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만약 인플레이션이 단순히 ‘화폐적 현상’이라면 전통적인 방식대로 금리를 올려 경기를 둔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기름값이 올라 물가가 올랐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석유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금리를 올린다고 석유 부족이 해결되진 않는다. 결국 복합적인 원인을 염두에 두고 인플레이션을 바라봐야 한다.”
-한국의 인플레이션 상황을 평가하자면.
“고령화가 최대 과제다. 한국의 고령층 부양 비용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경제가 저성장에 접어들면서 경제성장률보다 물가 상승률이 높은 ‘나쁜 인플레이션’이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다만 기업 간 경쟁, 기술 발전 등에 따른 가격 인하가 도움이 될 것이다.”
-고(高)인플레이션 시대,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자산이 없는 젊은 세대나 임대료를 내며 생활하는 임차인은 현실적으로 인플레이션에 맞설 수단이 없다. 결국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주택 공급이 중요하다고 본다. 주택을 짓기 위해선 숙련된 건설 근로자와 첨단 기술이 필요하다. 주택 공급 확대는 건설업 경기 부양과 일자리 창출 등 파급 효과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