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의 양태가 점차 국가 간 대항전으로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산업 육성 정책은 기업 단위 지원을 위주로 추진돼 왔다. 선택과 집중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빠른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뤄 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기술 경쟁 속에서 기존 방식은 오히려 불확실성을 키운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 경제학자 대회(ESWC) 참석을 위해 방한했던 얀 이크하우트 폼페우파브라대 교수는 최근 WEEKLY BIZ 인터뷰에서 “(개별 기업 대신) 국가 전체 산업을 지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했다. 이크하우트 교수는 벨기에 출신으로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유펜), 프린스턴대, 뉴욕대 등에서 경제학을 강의한 석학이다. 그는 저서 ‘이윤의 역설’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윤의 역설’은 기업이 많은 이윤을 거둔다고 해서 곧바로 경제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석한 책이다. 이번 인터뷰는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WEEKLY BIZ가 질문하고, 이크하우트 교수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韓 경쟁력 확보 방안은
-한국처럼 수출 주도형 국가에서는 여전히 주요 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편이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더 유리하지 않은가.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 전체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예컨대, 중국은 전기차와 태양광 패널 등 산업 전반의 인프라나 표준을 먼저 구축했고, 그 토대 위에서 선도 기업이 성장했다. 이런 접근은 한 기업의 실패에 국가 경제가 휘둘리지 않게 하고, 장기적으로 리스크를 줄이면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에서도 ‘국가 챔피언’ 담론이 부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국 기업을 국가 대표 기업으로 키우는) ‘국가 챔피언’ 모델은 양날의 검과 같다. 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개입하는) 산업 정책이 필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개별 기업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방식은 문제를 낳는다. 한 기업이 과도한 시장 지배력을 갖게 되면 신규 진입을 막고 혁신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한국에선 대기업의 시장 지배가 독점 문제를 키운다는 뜻인가.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압박을 받을 경우 투자와 혁신에 나서기 어렵다. 이는 산업 전반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일부 대기업이 공급망을 장악하면서 스타트업 창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국 역시 대기업이 협력 업체를 과도하게 옥죌 때 같은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노동 소득과 생산성, 같이 올리려면
-노동소득분배율(기업이 벌어들인 돈에서 근로자가 가져가는 몫)을 안정화하면서 혁신을 촉진하고, 동시에 시장 경쟁까지 유지하려면.
“먼저, 독점이나 단일 구매자 지위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강력한 경쟁 정책이 필요하다. 둘째, 대기업·중소기업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혁신 지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정책이 함께 작동할 때 성장과 공정성을 동시에 지켜낼 수 있다.”
-미국·유럽은 노동소득분배율이 꾸준히 하락했지만, 한국은 1990년대 하락 이후 안정세라는 주장도 있는데, 어떻게 보나.
“노동소득분배율이 건전한 경쟁과 생산성 확대로 유지된다면 긍정적이다. 반대로 혁신 투자 부진 때문에 ‘겉으로만 안정’이라면 문제다. 정부는 지속적인 혁신 투자가 꾸준히 이어지도록 하면서, 동시에 과도한 이익 집중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생산성 향상이 일부 기업에만 돌아가지 않고, 근로자의 임금·고용 개선으로 연결된다.”
-인공지능(AI) 같은 신기술은 생산성을 높이지만, 시장 집중과 암묵적 담합을 키운다는 우려도 있다.
“생산성 증가는 사회 전체에 긍정적이다. 그러나 AI는 시장 집중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건 혁신을 막지 않으면서 시장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반독점 정책을 집행하고, 개방형 표준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로 AI 확산이 가져올 혜택이 부작용보다 더 커지게 해야 한다.”
-기술 변화가 숙련 노동자에게 유리해 임금 격차를 키우진 않나.
“그게 바로 숙련 편향적 기술 변화 문제다. 해법은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에 있다. 근로자가 디지털 기술과 직업 능력을 꾸준히 배울 수 있어야 기술 발전의 혜택이 사회 전반에 고르게 퍼질 수 있다. 교육 시스템이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불평등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미래 세대 육성 방향은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산업의 인재 육성은 얼마나 중요한가.
“고부가가치 산업은 수출, 혁신, 임금 수준을 좌우하는 핵심 분야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대만과 중국의 거센 경쟁에 직면해 있다.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강력한 연구·개발 투자와 지식재산권 보호,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혁신은 늘 지속돼야 한다.”
-한국 학생들은 높은 임금과 안정성 때문에 공대보다 의대 진학을 선호한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보나.
“의학은 혁신적이고 성장 잠재력이 큰 분야이지만, 특정 분야로 인재가 지나치게 쏠리면 불균형을 초래한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공학과 기술 분야의 매력을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더 나은 보상, 다양한 경력 기회, 공공 연구 투자 등을 통해 학생들이 이공계 진로를 가치 있는 선택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 청년들은 낮은 임금과 높은 주거비 부담으로 투기나 결혼·출산 지연을 선택하는데.
“자산 불평등은 소득 불평등보다 심각하다. 자산은 복리로 불어나 격차가 빠르게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주택과 같은 자산 가격 상승은 청년층의 자산 형성을 막아 사회적 이동성과 안정성을 약화시킨다.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 주거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소수 기업이 이익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는 경쟁 정책도 부의 분배를 고르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