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램리서치가 지난 2022년 용인에 개관한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 전경. /고운호 기자

글로벌 인공지능(AI) 열풍 속에서 빅테크 업체들이 호황을 누리자 반도체 장비 업계도 함께 수혜를 누리고 있다. 특히 반도체의 성능과 생산 수율을 결정짓는 고난도 핵심 공정에서 독보적 입지를 가진 한 기업이 주목받고 있다. 세계 최고의 식각·증착 기술을 보유한 미국의 반도체 장비 업체 ‘램리서치(Lam Research)’다. 지난 4월 4일 주당 59.1달러까지 떨어졌던 램리서치의 주가는 6개월 만에 세 배 가까이 뛰며 최근 160달러를 넘어섰다. 지난 22일 실적 발표에선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기도 했다. 2026 회계연도 1분기 매출(지난 7~9월)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28% 증가한 53억2400만달러(약 7조6300억원)로 집계된 것이다. 램리서치는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며 웨이퍼 팹(WFE·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웨이퍼를 가공하는 데 쓰이는 장비) 판매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램리서치는 전통적인 반도체 강국인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89년 한국 지사를 설립한 이후 지난 35년 동안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오산·용인·화성 등에 있는 한국 공장에서는 첨단 장비를 직접 생산해 수출도 한다. 이에 전 세계 램리서치 지사 중 한국 지사가 가장 큰 매출을 올리는 상황이다. 그러나 B2B(기업 간 거래) 기업 특성상 램리서치는 일반 대중에게는 비교적 낯선 이름이다. WEEKLY BIZ는 이번에 램리서치가 반도체 장비 시장의 숨은 강자로 떠오른 배경을 분석했다.

◇‘8대 공정’ 중 두 공정서 독보적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이른바 ‘8대 공정’을 거쳐야 한다. 램리서치는 이 중 웨이퍼(칩의 토대가 되는 얇은 판)의 회로 구성에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식각(Etching) 공정’과 웨이퍼 표면에 얇은 막을 씌워 전기적 특성을 갖도록 만드는 ‘증착(Deposition) 공정’에서 두각을 보인다.

특히 반도체의 초미세화가 진행되고 있어 식각 공정의 정밀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3차원(D) 낸드, 3D D램 등 수직 적층 구조를 채택한 반도체 수요가 늘면서 더 깊고 정확하게 식각할 수 있는 장비의 필요성도 커졌다. 이에 램리서치는 올 초 3D 반도체 제조 공정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차세대 식각 장비 ‘아카라’를 선보였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는 파운드리 부문에서 아카라를 도입했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도 이 장비 도입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램리서치의 차세대 반도체 식각 장비 '아카라'. 아카라는 3D 칩 제조에 필수적인 식각 정밀도와 성능을 갖췄다. /램리서치

램리서치는 지난달 일본 JSR과 손잡고 차세대 반도체 핵심 소재로 꼽히는 무기물 포토레지스트(PR) 기술 개발에도 나섰다. PR은 반도체 칩에 아주 미세한 회로를 새길 때 사용하는 특수 화학물질이다. 램리서치는 종전에 강점을 보여온 증착 기술을 활용, 웨이퍼 위에 미세한 박막을 형성하는 드라이 레지스트 기술로 무기물 PR 시장에 진입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기술은 삼성전자가 연내 양산을 추진 중인 10나노급 6세대 D램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데이터센터 증설로 수요 급증”

전 세계적으로 AI 데이터센터 증설 바람이 불며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램리서치의 수주도 확대될 전망이다. AI 데이터센터는 최고 수준의 중앙처리장치(CPU)와 가속기, HBM 등이 필요하다. 이런 칩은 2.5D 및 3D 첨단 패키징 기술이 요구돼 반도체 기업의 WFE 투자도 커지는 추세다. 아처 CEO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데이터센터에 대한 1000억달러 투자당 약 80억달러가 WFE 구매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며 “램리서치의 식각·증착 기술이 AI에 필요한 고성능 반도체를 만드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AI 데이터센터로 인한 수요 급증이 향후 몇 년 동안 수십억 달러 규모의 WFE 시장 확대와 점유율 확보 기회를 창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시장조사 업체 ABI리서치에 따르면 현재 6111곳에 달하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는 2030년까지 8378곳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올해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WFE 투자도 당초 예상치인 1050억달러보다 다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반도체 기업들의 HBM 관련 투자가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다. 아처 CEO는 “내년에는 AI 관련 수요가 늘면서 첨단 반도체에 대한 투자가 늘고, 기존 공장 설비에 대한 투자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웨이퍼 세정’도 강점

램리서치는 웨이퍼 세정 장비 분야에서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웨이퍼 세정은 반도체 생산 현장에서 몹시 민감한 공정 가운데 하나로, 반도체 미세화가 진전될수록 작은 입자나 오염도 치명적 불량으로 이어질 수 있어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램리서치의 습식·건식 세정 장비는 경쟁사 대비 결함 발생률이 낮아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도 램리서치의 세정 장비를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