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금값 위 나는 은값이다. 1980년 헌트 형제의 은 투기 사태 이후 무려 45년 만에 은값이 1트로이온스(약 31.1g)당 50달러를 뚫으며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1970년대 유전 개발로 돈방석에 앉은 넬슨·허버트 헌트 형제는 당시 은을 대규모로 매집해 투기를 벌였고, 은 가격은 50달러 넘게 솟구쳤다.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헌트 형제의 벽’이 뚫린 셈이다. 글로벌 귀금속 정보 플랫폼 키코(KITCO)에 따르면, 지난 16일 은 현물 가격은 54.24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 1월 초(29.97달러) 대비 약 81% 폭등한 것으로, 같은 기간 61% 오른 금값을 훌쩍 뛰어넘는 흐름이다. 은값은 지난 22일 기준 48.49달러로 마감하는 등 주저앉았지만 여전히 50달러에 근접한 상태다. WEEKLY BIZ는 최근 은값 수직 상승의 원인을 분석했다.
◇지정학적 위기에 산업용 수요까지
우선 최근 은값이 치솟는 배경에는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가 꼽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8개월가량 이어지는 데다 최근엔 미·중 무역 전쟁이 재점화되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이에 금과 함께 글로벌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은을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스프롯(Sprott)은 최근 보고서에서 “은은 지정학적 긴장, 인플레이션 압력, 금융 시장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최근 상황에서 안전 자산으로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은은 금과 함께 위기 상황에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사용됐고, 금에 비해 훨씬 저렴해 개인 투자자들의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도 있다”고 적었다.
금과 은이 모두 안전 자산이란 공통점에서 글로벌 위기 상황에 함께 몸값이 뛰었다면, 은은 금과 달리 산업계 재료 수요까지 더해지며 그 몸값이 더 뛰고 있다. 가령 은은 태양광 발전 설비, 센서와 같은 자동차 전자 부품은 물론 휴대전화, 태블릿 등 일상적인 전자 기기에 널리 쓰인다. 스프롯에 따르면 산업용 수요는 전체 은 사용량의 59%를 차지할 정도다. 스프롯은 “태양광발전 설비는 2015년 전체 은 수요의 5.6%를 차지했는데, 지난해엔 점유율이 17%까지 늘었다”며 “은이 전기 전도성이 가장 높은 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기·전자 산업의 은 사용 증가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주요국들이 탈탄소 목표를 내걸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어, 당분간 산업용 수요는 은값 상승을 더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은값 100달러? 개인 투자도 몰려
은값 추가 상승 기대에 개인 투자자들 투자가 이어지며 가뜩이나 오른 은값은 더 뛰는 양상이다. 금·은 공급 업체 솔로몬의 폴 윌리엄스 매니징 디렉터는 최근 은값 상승을 두고 “은의 산업용 금속이자 가치 저장 수단이라는 이중적 속성이 안정성과 상승 잠재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며 “현재 시장 환경을 감안할 때 2026년 말까지 은 가격이 온스당 100달러에 도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BNP파리바 포르티스 필리프 히셀스 수석 전략가는 “은이 100달러를 넘어서는 날이 멀지 않았다”며 “역사상 가장 긴 귀금속 강세장 서막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투자자들의 ‘실버 러시’는 은값을 들썩이게 한다. 시가총액이 큰 금의 경우 각국 중앙은행의 매입이나 금융권의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통한 대규모 자본 유입이 가격 흐름을 주도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시장 규모가 작은 은은 개인 투자자들의 수요에 따라 가격 변동이 상대적으로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은값 추이를 두고 “은은 금보다 유동성이 적고, 시장 규모도 9분의 1 수준으로 작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는 가격 변동성을 증폭시킨다”고 밝혔다.
더구나 은은 공급량이 수요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스프롯은 “글로벌 은 생산량은 2016년 이후 7%가량 줄어들었고, 세계 은 공급은 7년 연속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누적된 공급 부족은 앞으로 가격 상승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했다. 이에 로이터통신은 “은 협회는 은이 5년째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은) 시장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뱅크오브아메리카(BoA)도 지속적인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유지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단기적 변동성은 존재
시장에선 다만 “은 투자 시 변동성에 유의하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골드만삭스는 “태양광발전의 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제조 업체들이 은을 구리와 같은 더 저렴한 재료로 대체하고 있다”며 은값의 단기적 하락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은의 산업용 수요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태양광발전 산업이 주춤하고 있고, 기업들이 비싸진 은의 대체재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면서 산업용 수요도 꺾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BoA는 단기적 하락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가격 상승은 이어질 것이라 예상한다. BoA는 최근 내년 은 가격 전망을 트로이온스당 65달러로 상향 조정하며 “내년에 은 수요는 11%가량 감소할 수 있지만 시장을 공급 과잉 상태로 몰아넣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