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슬레 이사회는 로랑 프레이세를 해임하고 필립 나브라틸을 네슬레의 새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프레이세의 사임은 직속 부하와 비밀 연애를 해 네슬레의 비즈니스 행동 강령을 위반한 데 따른 것입니다.”
지난 1일 스위스의 식품 대기업 네슬레는 홈페이지에 이런 내용을 공지했다. 네슬레는 최근 프레이세 CEO를 취임 1년 만에 전격 해임했는데, 이 조치가 경영상 이유가 아닌 사내 로맨스 때문이라고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다. 회사 측은 브랜드 이미지 훼손과 경영 공백을 우려해 솔직하게 진상을 밝히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외부의 반응은 차가웠다. 로이터는 “네슬레가 충격적 해임으로, 어려운 소비 환경과 미국의 무역 관세 충격 속에서 더 큰 불안정 상황을 맞았다”고 전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 역시 자사 고객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번 인사 변동으로 네슬레의 중기적 방향성에 대한 의문은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것이며, 주가 전망 역시 억눌린 채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CEO가 부하 직원과 벌인 비밀 연애가 들통나 기업 가치에 대한 의구심까지 키운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서 ‘사내 로맨스’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최근 몇몇 기업이 사내 연애로 논란에 휩싸인 뒤 기업 가치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자 인사 관리자들도 골머리를 앓는 모양새다. 한국 상황은 어떨까. WEEKLY BIZ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한국 직장인들의 사내 로맨스 실태를 들여다봤다.
◇직장인 다섯 중 하나 “사내 연애 해봤다”
국내 직장가에서도 사내 로맨스는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WEEKLY BIZ가 국내 20~60대 직장인 890명을 조사한 결과 ‘사내 연애를 해본 적 있다’고 답한 이는 응답자의 23.2%였다. 국내 직장인의 5분의 1 이상이 직장 상사·동기 또는 부하 직원과 연애를 한 적이 있는 셈이다. 연애 당사자는 아니지만 ‘사내 연애를 보거나 들은 적 있다’고 답한 비율은 60.9%나 됐다.
‘사랑은 죄가 없다’고 하지만 사랑이 싹튼 곳이 직장이라면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사내 로맨스가 개인의 업무 또는 조직 분위기에 미치는 파장 탓이다. 실제로 응답자 중 사내 연애를 경험한 적이 있는 206명 가운데 사내 연애가 업무에 ‘큰 방해가 됐다’고 답한 비율은 9.2%, ‘조금 방해가 됐다’는 비율은 21.8%에 이르렀다. 더구나 동료의 사내 로맨스를 지켜본 542명 가운데 사내 로맨스가 조직 분위기에 지장을 줬다고 한 응답은 약 40%(‘큰 지장을 줬다’ 7.6%, ‘조금 지장을 줬다’ 32.9%)였다. 결국 사내 연애가 본인의 업무 효율을 끌어내리는 건 물론 동료들의 근무 환경에도 피해를 줬다는 얘기다.
◇기업 가치까지 흔드는 사내 로맨스
연인 또는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내 불륜’은 파장이 더 크다. 최근 미국에선 경영진의 부적절한 애정 관계가 드러나 회사가 성명문을 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난 7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콜드플레이 공연에서 IT(정보통신) 기업 아스트로노머의 앤디 바이런 CEO와 크리스틴 캐벗 최고인사책임자(CPO)가 껴안고 있는 장면이 전광판에 송출됐는데,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숨기는 모습이 그대로 찍힌 것이다.
이후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퍼졌고, 두 사람이 각각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들을 해임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논란이 계속되자 회사는 CEO를 해고하고 뒤이어 CPO도 사임하는 결말을 맞았다. 당시 아스트로노머는 성명을 내고 “우리 리더들은 행동과 책임감에 있어서 모범이 돼야 했지만 최근에 그런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실제로 이번 WEEKLY BIZ 설문에서도 사내 불륜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봤다는 직장인 가운데 37.5%는 이런 불륜 행각이 “조직 분위기에 큰 지장을 줬다”고 답했다.
◇“사내 로맨스 조직 차원의 관리 필요”
사내 로맨스 때문에 실질적 피해를 봤다는 직장인도 적잖았다. 이번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14.3%는 사내 로맨스로 피해를 봤다고 밝혔고, 이들은 업무 ‘효율 저하’(44.1%) ‘편파적 인사·평가’(42.5%) ‘조직 내 파벌 형성’(39%) 등을 주요 피해 내용으로 적어 냈다.
직장인들은 회사에 사내 로맨스 관련 지침 등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사내 로맨스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19.1%, ‘일부 규제가 필요하다’ 25.2%, ‘최소한 가이드라인만 있으면 된다’가 34.5%로 집계된 것이다. 사내 로맨스가 개인의 업무 효율부터 근무 환경과 기업 가치 등까지 악영향을 줄 여지가 있는 만큼 조직 차원의 관리 및 대응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조미나 HSG 휴먼솔루션그룹 조직문화연구소 소장은 “사내 로맨스에 대한 수용 정도와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며 “회사는 업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인 만큼 사적인 관계로 인한 오해와 불편을 줄이기 위해 ‘직장 내 신체 접촉 자제’ 등과 같은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