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실리콘밸리로 통하는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 전경. 이곳엔 에릭손을 비롯해 1000여 개의 IT·통신 기업이 몰려 있다./시스타 홈페이지

지난달 15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차로 20분쯤 달리자 도착한 곳. 잔디밭과 산책로가 어우러진 북유럽의 한적한 풍경 속에 세계 IT 시장을 움직이는 ‘두뇌’가 숨 쉬고 있었다. 바로 ‘북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Kista Science City)’다. 축구장 280개 넓이에 해당하는 200만㎡ 규모의 이 지역엔 2003년 본사를 옮긴 에릭슨을 비롯해 1000여 개의 IT·통신 기업이 모여있다. 곳곳에 삼성전자, IBM, 텔레2, 후지쯔 등 글로벌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의 간판이 눈에 띄었다. 거리에선 배낭에 노트북을 멘 사람들이 영어, 스웨덴어, 중국어 등으로 대화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115국에서 온 2만명이 함께 일한다”는 현지 안내인 설명이 과장이 아니었다.

시스타에는 기업뿐 아니라 스톡홀름 왕립공과대(KTH), 스톡홀름대, 각종 연구소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산업과 학계가 긴밀히 어우러지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곧바로 사업으로 이어지는 생태계가 형성돼 있었다. 시스타 측은 “인공지능(AI), 통신, 사이버 보안, 나노기술 등 첨단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며 “전 세계 인재들이 모여 기술 발전의 현장을 만들어가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혁신 클러스터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배경에는 북유럽 특유의 제도와 문화가 있다. 수평적이고 투명한 의사 결정 구조, 두터운 사회 안전망,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 창업과 도전을 뒷받침하는 제도가 결합하며 인재와 기업이 몰려드는 선순환이 가능해진 것이다. 실제로 블루투스(근거리 무선통신), LTE(4세대 이동통신) 등 세계를 바꾼 기술 중 상당수가 바로 이 시스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래픽=김의균

북유럽은 오랫동안 모범적인 복지·공공 정책의 모델로 주목받아 왔다. 그러나 이 지역이 글로벌 대기업을 다수 배출한 ‘기업 경쟁력의 보고’란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 등 북유럽 4국을 모두 합쳐도 인구는 약 2800만명으로, 전 세계의 0.3%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지역 출신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매출·이익·자산·시가총액 등을 기준으로 매년 선정하는 ‘포브스 글로벌 2000’ 명단에도 북유럽 기업들이 매년 이름을 올린다. 올해는 노르웨이의 석유·가스 기업 에퀴노르(106위), 비만 치료제 ‘위고비’로 잘 알려진 덴마크의 노보 노디스크(158위) 등 북유럽 4국 기업 58곳이 명단에 포함됐다. 여기에 비상장사인 스웨덴의 가구 브랜드 이케아(IKEA), 덴마크의 세계 최대 장난감 제조업체 레고(LEGO) 역시 글로벌 시장을 이끌고 있다. WEEKLY BIZ가 현지에서 ‘노르딕 기업’의 성장 비결을 직접 들여다봤다.

그래픽=김의균

◇오히려 축복이 된 작은 내수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칼스빌라’ 1층 식당에 앉으면 고전 조각상이 세워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칼스버그 창업자의 아들 칼 야콥센이 1892년에 지은 아르누보 양식 건물로, 지금은 세계 최대 맥주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한 칼스버그의 회의 공간으로 쓰인다. 야콥 아룹-안데르센 칼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시사 주간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작은 나라에서 어떻게 많은 대기업이 나올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덴마크는) 작기 때문에 해외 시장을 무조건 봐야 했습니다. 우리의 작음은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실제로 북유럽 기업들은 내수 비율이 미미하다. 레고의 자국 매출은 전체의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아메리카(48%), 유럽·중동(39%), 아시아·태평양(12%)에서 거둔다. 세계 최대 보석 업체 판도라도 매출의 68%를 미국, 영국, 독일 등 해외에서 올리며, 덴마크 매출은 약 1%에 그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북유럽 10대 상장사의 국내 매출 비율은 평균 2%로, 미국(46%), 유럽(12%)과 비교해 확연히 낮다.

그래픽=김의균

기술 수용성 또한 북유럽 기업의 강점이다. 유럽연합(EU) 통계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직원 10명 이상 기업 중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는 비율은 EU 평균이 45.2%였지만, 북유럽 4국은 73%에 달했다. 이는 개방적인 제도와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는 환경 덕분이다. 핀란드는 ‘AI·디지털화 로드맵’을, 노르웨이는 ‘클라우드 퍼스트 전략’을 추진하며 인프라 확충, 규제 완화, 데이터 개방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장기 투자자 중심의 지배 구조가 결합되며 R&D 투자가 강화된다. 맥킨지에 따르면 북유럽 대기업의 80%는 장기 투자자 지배를 받고 있는데, 이는 미국(20%), 유럽 평균(60%)보다 높다. 노보 노디스크와 칼스버그는 비영리 재단이 최대 주주이고, 레고와 세계 2위 해운사 머스크는 창업 가문이 여전히 지배권을 쥐고 있다. 맥킨지는 “이 같은 구조가 단기 실적보다 장기 R&D 투자와 인재 육성을 가능케 한다”며 “실제로 북유럽 대기업들의 R&D 지출은 글로벌 평균을 웃돈다”고 분석했다.

◇기업 하기 좋은 북유럽

북유럽은 높은 복지 지출로 유명하지만, 기업 환경은 의외로 시장 친화적이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법인세율은 22%로 미국(21%)과 비슷하고, 스웨덴(20.6%)과 핀란드(20%)는 오히려 더 낮다. 미국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이 각국 경제의 시장 친화성과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평가해 발표하는 ‘경제자유도 지수’에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매년 세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자본시장도 우호적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연금 자산은 1조4000억유로(약 2280조원)에 달해 EU 전체 연금 자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특히 스웨덴은 2012년 투자저축계좌(ISK)를 도입해 양도차익이나 배당소득에 세금을 면제하며 개인 투자자의 자본시장 참여가 급증했다. 스웨덴 자본시장 전문은행 SEB의 칼 로세니우스 주식자본시장 총괄은 “스웨덴은 중소형 펀드가 조기에 활성화돼 IPO 선진국이 됐다”고 평가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2013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스웨덴에서는 501개 기업이 상장됐는데, 이는 프랑스·독일·스페인·네덜란드 4국 합계보다 많은 수치다. 카네기 그룹의 토니 엘로프손 대표는 “투자 문화와 풍부한 유동성이 기업을 상장으로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북유럽 기업이 직면한 도전 과제는

북유럽식 기업 모델은 강력한 사회 안전망, 장기 투자 기반, 기술 수용력, 유연한 제도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와 자본·속도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대에는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배터리 제조업체 노스볼트다. 2016년 설립돼 한때 유럽 배터리 산업의 ‘희망’으로 통했지만, 양산 지연과 품질 문제로 계약이 잇따라 해지되며 올해 3월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전문가들은 “생산 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확장과 해외 진출에만 치중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지정학적 위기와 보호무역 기조도 부담이다. 칼스버그는 2023년 러시아 정부에 의해 현지 사업장이 압류됐고, 머스크는 홍해 사태로 수에즈 운하를 우회해야 했다. 특히 미국 매출 비율이 평균 33%에 달하는 북유럽 상장사들에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 강화 기조는 큰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도전은 수출이 위주인 한국 기업들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핀란드에 본사를 둔 컨설팅 기업 ‘레달’의 왕호림 한국지사장은 “북유럽은 내수 시장이 작아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지만, 한국은 북유럽보다는 다소 큰 내수 시장 덕분인지 대기업 수요에 맞춘 개발이 우선이어서 해외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전제로 한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