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 영희를 향해 달려가는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 모습이 이럴까. 긴 카디건을 입은 여성 직장인이 추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보다가 살금살금 에어컨 온도 조절기에 다가선다. 그러고는 무심하게 버튼 두 번 꾹꾹. 에어컨 희망 온도가 24도에서 26도로 오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엔 셔츠 등이 땀범벅이 된 남성 직장인이 들키면 큰일 날 것처럼 몰래 온도 조절기에 접근한다.
지난 21일 서울 낮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기고 공기마저 습해 사우나 같던 날. 서울의 한 직장 사무실 내부는 종일 에어컨 온도가 21~27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출렁였다. 최근 사무실 실내 냉방 온도는 직장 내 갈등의 진앙이다. 일본에선 ‘에어하라’란 단어까지 등장할 정도다. 에어하라는 에어컨의 ‘에어’와 괴롭힘을 뜻하는 해러스먼트(harassment)의 일본식 표현 ‘하라’의 합성어로, 직장 상사가 에어컨 온도를 못 바꾸게 해 부하 직원의 업무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의미를 담았다. 한국에서도 ‘에어컨 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WEEKLY BIZ는 직장 내 실내 온도 문제를 둘러싼 직장인들 생각을 물었다. 설문은 지난 16~19일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20~50대 직장인 941명을 대상으로 했다.
◇추워도 더워도 忍忍忍
“홍수 점검 현장으로 차출돼 땀 흘리고 들어온 뒤 사무실 에어컨 온도를 낮췄더니 과장이 ‘왜 리모컨을 만지느냐’며 눈치를 줬어요. 그 뒤로는 더워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5년 차 공무원인 이모(32)씨는 사무실 밖에 나갈 일 없는 팀장이 에어컨 온도마저 자기 뜻대로 설정하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실내 온도 갈등은 ‘온도 권력’을 쥔 상사와 이를 따르기 마땅찮은 부하 직원 사이 종종 벌어진다.
실제로 이번 WEEKLY BIZ 설문에서 ‘직장에서 에어컨 온도와 관련해 겪었던 경험’에 대해 묻자(복수 응답),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불만이 이어졌다. ‘실내 온도 조절을 요청했지만 참으라고 묵살당했다’(12.5%), ‘상사가 눈치를 줘서 온도 조절이 어려웠다’(12.3%), ‘상사 몰래 온도를 바꿨다가 지적받았다’(12%) 등과 같은 답변이 많이 나온 것이다. 다만 ‘불만이 있었어도 표면적 갈등까지 일어나진 않았다’(17.3%)는 응답도 많았다.
젊은 직장인들의 경우 실내 온도 전권을 행사하는 상사에 대한 불만도 적잖았다. ‘상사가 실내 온도를 일방적으로 설정한다’는 답변은 20대(21.8%)·30대(18.3%)가 50대(13.0%)보다 높았다. 특히 20대 남성 직장인 넷 중 하나(27.3%)는 상사의 일방적 온도 설정이 불만이라 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추워도 더워도 참을 인(忍) 자 새기고 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설문 결과, 직장인 대다수는 ‘실내 온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거나 아무 말도 못 했다’(68.3%)고 답했다. 대안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개인 냉방 기기를 사용한다는 직장인(25.5%)도 적잖았다.
◇男 “너무 더워요” 女 “냉방병 걱정”
실내 온도 갈등의 또 다른 축은 남녀에 따른 선호 온도 차이다. 같은 온도에도 여성은 “너무 춥다”고 불만이고, 남성은 “더워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특히 이런 차이는 20~30대 직장인 남녀에게서 상대적으로 두드러졌다. 이번 설문에서 추위에 불편을 느끼는 여성은 15.5%로 남성(9.5%)보다 월등히 높았다. 또, 전체 연령대로 보면 ‘냉방병, 감기, 근육통 등 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여성이 20.1%로 남성(18.5%)보다 높았다. 반대로 실내 온도 때문에 ‘불쾌감과 스트레스가 증가한다’는 응답은 남성이 34.6%로 여성(27.5%)보다 높았다. 실내 온도 탓에 ‘업무 집중력이 저하된다’(23.6%), ‘상사와의 관계가 악화된다’(21%)고 응답한 남성 비율도 여성(각각 18.3%, 13.3%)보다 높은 편이었다.
남녀 사이 ‘온도 갈등’은 직장인 커뮤니티 앱 같은 온라인 공간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최근 블라인드에 올라온 ‘여직원이 에어컨만 켜면 춥다고 한다’는 제목의 글에는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도 춥다고 한다”며 “결국 회사 대표가 (여직원에게) 얇은 여름용 점퍼를 하나 사다 줬더니 해결됐다”고 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어쩔 수 없다. 남녀의 여름 의상 재질이 달라 체감온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여름에 에어컨이 춥게 느껴지면 외투를 챙겨 오는 게 맞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 “그라운드 룰부터 만들어야”
에어컨 온도는 업무 능률과 직결되는 만큼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게 요즘 직장인들 다수의 생각이다. 이번 설문에 참여한 직장인들 역시 ‘냉방 기준 마련’(29.5%)을 요구하거나 ‘팀 내 자율 조정 시스템 강화’(28.3%), ‘직원 대상 냉방 민감도 설문 실시’(24.8%) 등을 해결 방안으로 꼽았다.
인사 컨설팅사 콘페리의 이종해 파트너는 “요즘 직장인들은 쾌적한 업무 환경이 노동 생산성 증가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며 “이제는 기업도 금전적 보상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직원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섬세한 ‘소프트웨어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미나 HSG 휴먼솔루션그룹 조직문화연구소 소장은 “에어하라 같은 직장 내 갈등은 구성원 간 정보 부족과 그라운드 룰(조직 내 규칙)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며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외부 기온이 일정 수준 이상일 때 실내 온도를 몇 도로 맞춘다는 식의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