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의 이슬람 칼라 국경에서, 이란에서 돌아온 아프간 난민들이 고향으로 떠나기 전 등록을 위한 캠프에서 식량을 받고 있다./EPA 연합

전 세계 곳곳에서 당장 끼니를 때우지 못할 정도의 ‘식량 위기 인구’가 속출하고 있다. 글로벌 식량 위기 대응 기구인 식량안보정보네트워크(FSIN)와 식량위기대응글로벌네트워크(GNAFC)가 공동 발간한 ‘2025 세계식량위기보고서(GRFC)’에 따르면 지난해 식량 위기 인구는 2억9530만명으로 집계됐다. 국민소득이 낮거나 국제 원조를 받는 등 식량 공급 우려가 있는 65국 13억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이는 같은 기관이 2020년 내놓은 식량 위기 인구(1억5910만명)에 비해 4년 만에 86% 증가한 수치다.

그래픽=김의균

◇감염병처럼 퍼지는 식량 위기

식량 위기 인구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였지만, 대체로 기존에 위기에 직면했던 국가에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동아프리카의 수단은 지난 1년 동안 식량 위기 인구가 530만명 늘어나 2560만명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이 식량 부족 상태에 놓인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는 같은 기간 식량 위기 인구가 690만명 늘어 3180만명으로 집계됐고, 중동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지난해 전체 인구에 해당하는 220만명이 식량 위기 상태에 놓인 것으로 분류됐다. GRFC는 식량 안보 수준을 심각성에 따라 5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심각한 ‘재앙·기근’ 단계에 해당하는 인구 200만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0만명이 가자지구 주민이었다. 이처럼 식량 위기는 한 지역에서 발생하면 삽시간에 퍼지며, 감염병처럼 확산해 막대한 피해를 낳고 있다.

◇전쟁이 불붙인 식량 부족

글로벌 식량 위기가 더욱 악화된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 GRFC는 ‘분쟁과 불안정’을 주범으로 꼽았다. 연구진은 “지난해 20국에서 1억3980만명이 전쟁과 내전, 정치적 혼란 등의 이유로 식량 위기를 겪었다”며 “이 국가들은 대부분 중동과 아프리카의 저소득 국가”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단이다. 수단은 2023년 4월부터 정부군(SAF)과 준군사 조직 신속지원군(RSF) 간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무력 충돌이 2년 넘게 계속되면서 지금까지 최대 15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 5100만명 중 1300만명이 난민으로 내몰려 기본적인 식량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

중동의 가자지구도 예외는 아니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보고서는 “전쟁은 단순히 폭격이나 사망자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강제 이주, 사회 갈등, 식량 생산 중단, 공급망 붕괴 등 연쇄적인 악영향을 일으킨다”며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식량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 충격과 기후변화도 한몫

기후변화와 경제적 충격 역시 식량 위기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이란 분석도 나왔다. GRFC에 따르면 지난해 기후변화는 18국 9610만명을 식량 위기로 내몬 주요 원인이었다. 연구진은 특히 태평양 적도 부근의 해수면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폭염, 가뭄 등 기상 이변을 일으키는 ‘엘니뇨 현상’에 주목했다. 이들은 “지난해 세계 기온은 엘니뇨 현상 탓에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고, 34국에서 최고기온 기록이 경신됐다”며 “(엘니뇨로 인해) 다양한 지역에서 무덥고 건조한 기후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농사가 망하고, 가축이 폐사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경제적 충격도 식량 위기를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보고서는 “경제적 충격은 지난해 15국 5940만명의 식량 위기를 초래한 핵심 원인이었다”며 “세계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데다 상품 무역이 위축되면서 저소득 국가들이 직격탄을 맞았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어 “(식량 위기가 심각한) 중동, 중앙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선 상품의 생산 및 유통 위축, 무력 충돌,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경제적 전망이 악화되고 있어 문제”라고 했다.

◇불씨 꺼지지 않는 식량 위기

문제는 전 세계에 닥친 식량 위기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력 충돌은 장기화되고 있는 데다 미국의 ‘관세 전쟁’은 시장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폭염, 가뭄과 같은 이상 기후도 잇따르며 식량 생산 기반마저 흔들리는 상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식량 위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 여력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현재 전체 국가의 4분의 1이 식량 지원 프로그램을 돌릴 예산조차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이 커지자 각국 정부가 식량 지원에 소극적으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국제개발처(USAID)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게 대표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USAID 해외 원조 계약의 90% 이상, 총 600억달러 규모를 삭감했으며, 전체 프로그램의 약 83%를 폐지하고 직원 94%를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GRFC 조사에 따르면 2016~2024년 사이 주요 후원 기관 가운데 USAID가 전체 지원액의 약 50%를 담당해 왔다.

각국의 후원 축소로 인해 앞으로 최소 1400만명의 아이들이 국제 식량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GRFC에 “식량 위기는 갈등, 지정학적 긴장, 기후 위기, 경제적 격변 등으로 고조되고 있다”며 “굶주림과 영양 실조가 확산되는 속도가 국제사회의 대응을 압도하고 있는 만큼 정부, 기업과 의사 결정권자들이 이 위기의 심각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