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역 앞 마루 빌딩 1층 한쪽엔 흥미로운 전시 공간이 있다. 바닥 일부가 유리로 돼 있어 그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긴 목재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 공간의 끝에는 소나무 말뚝의 형상을 본뜬 듯한 철골 구조물이 하늘을 향해 세워져 있다. 구조물에는 ‘2002’부터 ‘2100’까지 숫자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어떤 의미일까.
마루 빌딩은 마루노우치 빌딩의 줄임말이다. 마루노우치 지역은 19세기 후반, 미쓰비시 그룹이 정부에서 땅을 불하받아 개발한 곳이다. 1894년 ‘미쓰비시 1호관’을 시작으로 1911년까지 총 13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그 길이는 약 100m. 당시 일본에서는 대략 109m의 길이를 1정(丁)이라 했는데, 런던의 롬바르드 거리를 본떠 이 거리를 ‘잇초 런던(1丁 London)’이라 불렀다.
1914년 도쿄역 개통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 지역이 교통 요지로 변모하면서 오피스 수요가 급증했고, 1923년엔 동양 최대 규모 오피스 빌딩인 마루 빌딩이 탄생했다. 지상 9층, 지하 1층, 높이 31m, 연면적 10만㎡ 규모 이 건물은 그렇게 세워졌다.
1층과 지하에는 수십 개 상점과 레스토랑이 입점해 사무와 리테일이 결합한 복합 시설이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형태였다. 특히 지반이 약한 지역 특성상 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직경 30㎝, 길이 15m의 소나무 말뚝을 5443개나 박았다. 이 소나무 말뚝 덕분에 마루 빌딩이 세워진 지 반년 만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에도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시오도메, 시나가와, 에비스 등에 첨단 오피스 빌딩이 잇따라 들어서자, 미쓰비시 그룹 내부에선 ‘마루노우치 지역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1998년 마루노우치 재건축이 결정됐다. 그 상징적 첫걸음으로 마루 빌딩의 철거 및 신축이 추진됐다. 높이 31m였던 마루노우치 빌딩은 2002년 높이 180m 초고층 빌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최상층인 36층을 비롯해 4개 층에는 레스토랑이, 5개 층에는 쇼핑 공간이 입점했다. 문을 연 지 한 달 만에 방문객 수가 280만명을 넘겼을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기존 건물을 해체할 때 지하에 박혀 있던 소나무 말뚝 5000여 개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가 있었다.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판단 아래 그중 하나를 보존하기로 했고, 그것이 앞서 언급한 전시 공간의 목재이다. 철제 구조물에 2002년부터 2100년까지 숫자를 새겨 넣은 건 향후 100년을 함께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목재를 바라보는 마음이 사뭇 달라진다. 80년 가까이 물속에 잠겨 있었고, 이후 20년 넘게 이 자리에 보존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루 빌딩 자체가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런 유구한 세월을 지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마루 빌딩을 지탱했던 100년 된 소나무 말뚝은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자산이다. 이러한 자산을 ‘헤리티지(heritage)’라고 부른다. 요즘 브랜드 자산 구축의 핵심 요소로 헤리티지가 주목받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유산을 소비자가 실제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강력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그러다 보니 흥미로운 현상도 발견된다. 2008년 싱가포르에서 설립된 차 회사가 ‘1837 TWG 티’라는 제품을 만들고, 2019년에 생긴 커피 회사가 ‘1910 바샤 커피’라는 브랜드를 내세우는 사례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떨까. 전통 산업 분야에서는 우리 기업들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존 헤리티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반면 바이오나 AI처럼 새롭게 떠오른 산업 분야에서는 글로벌 기업이든 우리 기업이든 그 역사가 짧다. 이제부터 어떤 헤리티지를 만들어나갈 것인지, 지금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