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세계 최대 여성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의 이사회에는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행동주의 투자 펀드 ‘배링턴 캐피털’. 이들은 “회사의 지분 1% 이상을 보유하고 있고, 추가 매입도 고려 중”이라며 본격적인 경영 개입 의사를 밝혀왔다. 배링턴 측이 요구한 핵심은 ‘이사회 전면 교체’였다. 실적 부진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경영진의 무능이 문제라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한때 여성 모델들이 천사의 날개를 달고 런웨이를 누비는 이미지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속옷 브랜드로 군림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전성기는 빛이 바랬다. 2021년 모회사 엘브랜즈(L Brands)에서 분사해 단독 상장했지만, 이후 주가는 57.2% 급락했다.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약 24억달러(약 3조3000억원)가 증발한 셈이다. 그러다 배링턴의 서신이 공개된 날 빅토리아 시크릿의 주가는 3% 올랐다. 시장에선 “그간 실망스러웠던 경영 성과를 답답하게 여겼던 주주들이 다시 회사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꺾인 것만 같았던 천사의 날개를 다시 활짝 펼칠 수 있을까. WEEKLY BIZ는 배링턴이 이사회에 보낸 서신,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1분기 실적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빅토리아 시크릿의 위기 원인과 향후 대안을 분석했다.
◇쪼그라든 실적, 추락한 주가
배링턴이 이사회에 보낸 서신에서 가장 먼저 지적한 건 빅토리아 시크릿의 ‘저조한 실적’이었다. 배링턴은 “빅토리아 시크릿은 독립 기업이 된 이후 업계 평균은 물론 전체 시장 대비로도 뚜렷하게 부진한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배링턴 측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크릿의 주가 낙폭(-57.2%)은 경쟁사들에 비해 훨씬 컸다. 2021년 6월 21일 상장 당시부터 현재(6월 13일)까지 주가 변동을 비교했는데, 경쟁 업체들은 평균 9.8%의 주가 하락에 그쳤다. 이 기간 S&P500은 오히려 41.5% 올랐다.
주가뿐 아니라 매출도 추락했다. 지난해 빅토리아 시크릿 매출은 62억달러로 2016년 최고치(78억달러)보다 20.5% 떨어졌다. 배링턴은 “지속적인 매출 감소와 재고 증가 등은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뿌리 깊은 운영·전략적 결함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며 “회사의 실망스러운 성과는 고위 경영진의 높은 이직률, 마케팅 및 상품화 전략 부족 등이 원인이라고 여겨진다”고 했다.
◇“오만하고 전문성 없는 경영진”
배링턴은 특히 현재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힐러리 수퍼와 이사진을 강하게 비판했다. 배링턴은 서한에서 “수퍼는 상장 기업 경영 경험이 부족하고, 소매 의류 업계 근무 경력도 짧으며, 직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 “회사의 핵심 사업과 국제적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핑크(빅토리아 시크릿의 운동복 브랜드)’와 같은 보조 브랜드를 재출시하는 등 전략적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수퍼 CEO의 언행도 도마 위에 올랐다. 배링턴은 “최근 실적 발표회에서 수퍼 CEO가 자신이 꾸린 경영팀을 ‘수퍼 스쿼드(Super Squad)’라 부르며 자화자찬했는데, 당시 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기쁘다’ ‘자랑스럽다’는 표현을 총 14차례나 반복했다”며 “매출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나온 이 같은 발언은 오만하고 부적절하다”고 했다.
과도한 보수도 문제 삼았다. 미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크릿의 이사들은 지난해 24만~43만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수퍼 CEO는 주식과 성과급 등을 포함해 총 8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는 직원 임금 중위값인 약 9000달러와 비교할 때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포이즌 필, 기업 가치 높일 기회 막아
사실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 참여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3월 호주의 BBRC 인터내셔널이 빅토리아 시크릿 지분 13%를 확보하면서, 시장에선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회사는 이른바 ‘포이즌 필(신주 인수 선택권)’을 도입해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 포이즌 필이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기 위해 기존 대주주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신주를 발행해주는 수단을 뜻하는데 미국에선 이런 수단이 허용된다. 빅토리아 시크릿 이사회도 “향후 새로운 투자자가 지분 15%를 넘게 확보할 경우 포이즌 필이 발동한다”는 안건을 의결한 바 있다. 그러나 배링턴은 이 같은 대응에 대해 “경영진의 지위만 보호하고, 기업 가치를 높일 변화의 기회를 차단하는 조치”라고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배링턴은 “포이즌 필 도입은 잠재적으로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제안을 억제할 수 있다”며 “의미 있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경영진과 이사회를 고착화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핵심 브랜드 강점에 집중해야
배링턴은 빅토리아 시크릿의 부진한 회복세를 타개하기 위해 “핵심 브랜드에 다시 집중하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브래지어를 포함한 핵심 제품 카테고리에 역량을 집중하란 주문이다.
배링턴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빅토리아 시크릿의 과거 성공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당초 ‘남성이 여성에게 사주고 싶은 속옷’이란 마케팅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다. 섹시한 디자인을 앞세우고, 전속 모델을 ‘에인절(Angel)’이란 이름으로 기용했다. 에인절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행되는 패션쇼에 날개를 달고 나왔고, 이 쇼에 서는 것만으로 스타가 됐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여성들은 ‘남성의 시선을 위한 속옷’에 거부감을 표출했다. 살이 찌거나 트랜스젠더인 모델을 거부해온 빅토리아 시크릿은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결국 2018년을 끝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패션쇼는 열리지 않게 됐다. 이후 회사는 변했다. 지난해 패션쇼를 부활시키며 다양한 체형의 모델은 물론 트랜스젠더 모델도 무대에 세웠고, 브랜드는 기존 ‘섹시 속옷’ 이미지를 벗고 여성 스포츠웨어와 일상복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가격도 낮춰 더 넓은 소비자층을 공략하려 했다.
문제는 이런 변화에도 브랜드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코노미스트는 투자은행 관계자를 인용해 “(타깃을 넓히는) 저가 전략을 포기하고 프리미엄 정체성을 회복하는 게 오히려 회생의 길일 수 있다”고 했다.
◇“더 잘할 수 있고, 더 잘해야”
배링턴은 그럼에도 “빅토리아 시크릿은 더 잘할 수 있고, 더 잘해야 한다”며 서신을 마쳤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독립하기 전 모회사인 엘브랜즈의 자문을 맡아 주가를 221.5% 끌어올린 배링턴이 빅토리아 시크릿도 살릴 수 있다는 기대를 내비친 것이다.
배링턴은 “최근 몇 년 동안 회사의 많은 실수와 실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크릿은 매력적이고 상징적이고 선도적인 브랜드로 남아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북미 시장에서 18.3%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젊은 소비자 사이에서 높은 충성도와 인상적인 온라인 팔로어 수를 확보했다는 점도 장점으로 봤다. 그러면서 “이사회가 실수를 인정하고, 배링턴의 제안을 받아들여 변화와 가치 창출을 가속화한다면, 빅토리아 시크릿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