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가 악화되면서 안전자산인 금값이 치솟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한국금거래소에서 직원이 골드바를 정리하는 모습. /뉴시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리며 금값이 무섭게 치솟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된 가운데 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에 미국까지 가세하는 등 지정학적 갈등이 커지며 글로벌 대표 안전 자산인 금을 찾는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25일 기준 국제 금 가격은 트로이온스당 3339달러로, 지난 1년 동안 가격이 약 45% 올랐다.

그래픽=김의균

◇위기 때마다 ‘금값’이 된 金

금은 역사적으로 위기 속에서 빛났다. 전쟁이나 글로벌 경기 침체와 같은 대형 리스크들이 터질 때마다 금 강세장이 펼쳐졌다. 최근 금값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배경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 미·중 무역 갈등,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 등 각종 지정학적·경제적 불안 요인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데 있다.

일러스트=김의균

치솟는 물가도 금값 상승의 불쏘시개가 됐다. 팬데믹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돈을 쏟아부으며 통화가치는 떨어졌고, 이에 따라 각국 투자자들은 종이화폐 대신 인플레이션을 방어할 수 있는 안전 자산인 금으로 눈을 돌렸다. ‘돈의 가치’가 흔들릴수록 ‘금의 가치’는 오히려 단단해진 셈이다.

이처럼 금값 상승을 부추기는 조건들이 하나둘 맞춰지면서 글로벌 투자 기관들도 연이어 금 강세론을 내놓고 있다. 영국의 EBC파이낸셜그룹은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금은 안전 자산으로서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EBC는 “금은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730달러에서 2년 만에 1300달러까지 올랐고, 2020년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 우려 속에 올해 4월에는 3500달러 선까지 급등했다”며 “올해도 지정학적 리스크와 무역 전쟁 여파가 겹치면서 금값이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금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중앙은행들

최근 국제 금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움직임 중 하나는 각국 중앙은행이 주요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지난 10일 ‘2026년 금값이 온스당 4000달러를 돌파할 것인가’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금값 상승의 주요 근거로 중앙은행의 매수 움직임을 언급했다. JP모건은 “중앙은행들의 연간 금 매수량은 지난 3년 연속 1000t을 웃돌았고, 현재 매수 추이를 감안하면 내년까지 매수 강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의 정책적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 상황 탓에 (중앙은행들이) 금을 통한 자산 다각화에 나서면서 올해 매수량도 900t에 이를 전망”이라고 전망했다.

중앙은행은 통상적인 외환 보유 전략에서 헤지(위험 회피)를 위해 안전 자산에 분산 투자하는데, 안전 자산으로 인정받던 미국 달러와 국채의 신뢰가 최근 흔들리면서 금 수요가 상대적으로 더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반적으로 금은 채권·달러와 달리 이자가 없는 ‘비수익성 자산’이기 때문에 금 수요는 금리와 달러 가치의 흐름과 반비례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고관세 정책 등으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며 달러와 채권 가격이 동반 하락하자 금이 반사이익을 누린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유로화·엔화 등 주요 여섯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지난 25일 97.68을 기록하며 2022년 3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글로벌 투자자들 사이에선 ‘탈(脫)달러’ ‘미국 자산 헤지’ 흐름이 본격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JP모건의 귀금속 전략 책임자인 그레고리 시어러는 “금은 미국 국채와 통화 펀드의 전통적인 경쟁자”라며 “금은 올해부터 내년까지 이어질 경기 침체 우려, 자산 가치 하락, (고관세와 같은)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 등 여러 복합적인 상황에서 최적의 헤지 수단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금리 인하 기대에 금값 상승 탄력

국제 금값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배경엔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금 가격이 최고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란 보고서에서 “현재 투자자들이 금리 인하를 예상하고 금 보유량을 늘리고 있어 금 가격은 추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통상 금리가 높아지면 투자자들은 이자를 얻을 수 있는 예·적금 또는 채권으로 몰리고, 금리가 낮아질 경우 금 같은 자산이 더 매력적으로 부각된다. 금은 비수익성 자산이지만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이라 금리가 낮아져 시장에 돈이 풀리면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는 “개인 투자자들이 미 국채와 같은 미국 자산에서 벗어나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기 위해 금을 찾고 있다”며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미국 자산 시장에서 돈이 빠져나와 국제 금 시장으로 유입될 경우 금값은 한층 더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글로벌 금 상장지수펀드(ETF) 전체 자산 규모는 미국 국채 시장의 약 1%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국 국채를 판 일부 자금만 금 시장으로 유입돼도 가격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향후 금값 전망도 낙관적이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말까지 금값이 트로이온스당 3700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JP모건 역시 올해 말까지 트로이온스당 3675달러, 내년 2분기까지 4000달러를 목표가로 제시했다. 향후 1년 동안 많게는 약 20%의 추가 상승 여력이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