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사람은 어떤 일이 기억 속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으면, 그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경제학에선 이를 ‘가용성 휴리스틱(heuristic·빠르게 어림짐작으로 내리는 의사 결정)’이라고 부른다. 미국 달러가 수십 년 동안 기축통화로 군림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달러 외 다른 통화가 그 지위를 대신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달러 가치는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로화·엔화 등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는 연초 대비 10% 가까이 떨어졌다. 같은 기간 원화 대비로도 8% 이상 하락했다. 많은 이의 관심은 이 흐름이 일시적인 조정인지, 아니면 구조적 변화의 전조(前兆)인지에 쏠려 있다.

달러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신뢰’에 달려 있다. 1971년 이전까지만 해도 달러 가치는 금에 연동돼 있었고, 달러를 가진다는 것은 곧 금을 보유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해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을 중단하면서 달러는 금이 아닌 미국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자립 통화’로 바뀌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뢰란 이 통화를 보유하고 있어도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으리란 믿음이다. 예컨대 금리는 낮은데 물가 상승률이 높아진다면 10년 뒤 오늘의 10달러로는 빵 한 조각 사기도 어려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달러를 보유할 유인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책에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만약 연준이 정치권이나 이익집단의 압력에 휘둘린다면 물가 안정 목표 달성은 어려워지고, 이는 곧 달러에 대한 국제 신뢰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의 재정 적자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신용 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정부 부채를 이유로 미국의 신용 등급을 한 단계 낮췄다. 미국은 여전히 기술 혁신과 국제 금융 질서를 주도하지만, 계속되는 재정 적자와 부채 누적은 시장의 신뢰를 흔들고 있다.

달러의 신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은 달러 기반 투자 자산의 다양성과 매력이다. 그러나 투자 매력이 미국 외 지역으로 이동하면 달러의 위상도 흔들릴 수 있다. 과학기술 발전의 선행 지표인 네이처 인덱스 기준으로 지난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재도약 움직임도 감지된다.

그럼에도 달러는 향후 10~20년은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장기 투자를 고려하는 이라면 30년 뒤에도 그 지위가 유지될지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수십 년 동안 달러가 기축통화였기에 그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기 쉽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세계 금융의 중심은 영국 파운드였고, 그 이전에도 통화의 중심축은 늘 바뀌어 왔다. 인간 관계에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것처럼 달러 역시 국제적인 신뢰 유지에 이미지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준목 경제 칼럼니스트(미래에셋증권 고객자산배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