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이 정치인들의 공격이나 입김에 흔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통화정책을 펼쳐야 물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교수는 최근 WEEKLY BIZ 인터뷰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일 자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며 압박을 이어가는 가운데 나온 발언이다. 트럼프는 지난 6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연준이 금리를 1%포인트 인하해야 한다”고 썼고, 같은 날 취재진을 만나 “새 연준 의장 후보를 곧 발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 대해 “금리를 너무 늦게 내린다”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트럼프는 지난 4월에도 파월을 해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WEEKLY BIZ는 라잔 교수를 비롯해 배리 아이컨그린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교수, 캠벨 하비 듀크대 교수 등 경제 석학들에게 트럼프의 연준 압박이 불러올 후폭풍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포퓰리즘에 휘둘리면 물가 치솟아”
인도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라잔 교수는 정부 주도의 규제와 포퓰리즘 정책에 날 선 비판을 해온 경제학자로 유명하다. 라잔 교수는 2013년부터 3년 동안 인도 중앙은행 총재로 일하던 시절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소속된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BJP)으로부터 “(기준금리를 높게 유지해) 고의로 인도 경제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정치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금의 파월처럼 이미 10여 년 전 정치인들의 금리 인하 압박에 시달렸던 셈이다.
라잔 교수는 “트럼프와 같은 정치 지도자는 대개 금리를 낮춰 단기적인 경기 부양을 꾀하지만,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금리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물가가 올라 대다수 사람이 고통받는 상황을 피하려면 중앙은행이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고 자율적으로 금리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미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4%로 연준의 관리 목표(2%)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트럼프가 밀어붙이는 관세 정책 영향으로 다시 높아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라잔 교수는 “정치적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기준금리를 높게 유지)를 드러낼 수 있어야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비 교수는 튀르키예를 예로 들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2021년 3월 취임한 지 넉 달 된 중앙은행장을 “기준금리를 인상했다”는 이유로 해임했다. 이후 튀르키예 물가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됐고, 2022년 10월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5.5%까지 치솟았다.
◇“파월 해임? 전통을 파괴하는 것”
트럼프가 의장 임기가 1년 가까이 남은 파월을 대신할 새 연준 의장을 조기에 지명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도 이어진다. 지난 7일 로이터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날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차기 연준 의장에 대한 결정이 곧 발표될 것”이라며 “훌륭한 연준 의장이란 금리를 인하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월가에서는 트럼프가 실제로는 권한이 없는 차기 ‘그림자 연준 의장’을 임명한 다음 연준을 비판하게 해 파월의 권위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온다.
라잔 교수는 “만약 대통령이 (임기가 남은) 연준 의장을 해임한다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해온 그간의 전통을 파괴한다는 뜻”이라며 “대통령이 실제로 그런 법적 권한을 갖고 있는지 역시 불확실하다”고 했다. 아이컨그린 교수와 하비 교수 역시 “연준 의장을 해임하려면 법률 위반 행위와 같은 명확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트럼프가 법률을 존중한다면 파월 의장을 해임할 수는 없을 것”이란 입장을 보였다.
경제 석학들은 연준 의장 해임이란 초강수 카드는 자칫 미국 금융시장의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라잔 교수는 “미국 정부는 (재정 적자 때문에) 막대한 규모의 국채를 계속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만약 투자자들이 연준의 독립성이 무너졌다고 인식하는 순간 채권 금리 상승(미국이 지급해야 하는 국채 이자 증가)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연준의 독립성이 위협받았을 때 미국 자산 투자자들이 보여준 부정적인 반응이 역설적으로 파월 의장을 지켜주는 현실적인 방어막이 되고 있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은 다르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미국 연준보다 더 빠르게 기준금리를 끌어내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ECB는 지난해 6월 연 4.5%였던 기준금리를 4.25%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총 8차례 금리를 내렸다. 반면 연준은 지난해 9월 금리 인하를 시작해 세 차례 인하한 이후 기준금리를 동결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 4.5%로, 유로존(연 2.15%)보다 여전히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럽과 미국 경제의 ‘체질 차이’가 크다고 지적한다. 아이컨그린 교수는 “유럽은 미국보다 물가 상승률이 낮고, 경제성장률도 둔화돼 있는 상태라 미국이 ECB의 통화정책 방향을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 때문에 연준이 금리를 내리기 더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있다. 하비 교수는 “연준은 당초 금리를 추가로 내릴 여지가 있었지만, 트럼프의 관세 부과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며 “관세가 물가를 다시 자극할 가능성이 있어 연준은 금리를 내리기도, 그대로 두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