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종전에 특정 질환에 쓰던 약물을 전혀 다른 병의 치료제로 쓸 길이 훨씬 빨리 열릴 겁니다.”
지난 7일 화상으로 만난 데이비드 페이겐바움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15년 전 자신의 생사를 가른 순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2010년 25세 의대생이던 페이겐바움은 가톨릭 사제에게 병자성사(病者聖事)를 받았다. 중환자에게 임종 직전에 하는 의식을 그가 받은 것은 희소병 ‘캐슬만병(Castleman Disease)’을 앓았기 때문이다. 림프절이 과도하게 증식하는 이 질환은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기에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 “의사들이 다섯 번이나 ‘당신은 곧 죽을 것’이라 말했고,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1%만 있어도 붙잡아야겠다고 결심했죠.” 페이겐바움은 환자이자 연구자 처지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수천 쪽이나 되는 자기 의료 기록과 관련 논문을 분석했고, 스스로 혈액을 채취해 정밀 검사를 이어갔다. 마침내 그는 장기 이식 환자에게 사용하는 ‘시롤리무스’라는 면역억제제를 찾아냈고, 이를 투약해 11년째 재발하지 않고 있다. 페이겐바움 교수는 “내 병이 호전되자, 다른 약물도 전혀 다른 병에 효과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이게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에 뛰어든 계기”라고 말했다. 최근 생성형 AI 기술의 발전은 그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고 있다. WEEKLY BIZ는 페이겐바움 교수에게 약물 재창출과 AI 기술 활용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른 병에 쓰임새 넓히는 재창출
-약물 재창출이란 무엇인가.
“특정 질병 치료를 위해 개발한 약물을 전혀 다른 질병에도 활용할 수 있는지 찾아보는 과정을 말한다. 질병의 증상은 다르더라도 질병의 근본적 병리 기전이 같을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어, 한센병과 다발성 골수종(암)은 증상은 전혀 다르지만 두 질환 모두 같은 생리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경우 ‘탈리도마이드’란 동일한 약물을 치료에 쓸 수 있다. 약물 재창출은 (마땅한 치료법 없이 희소 질환을 앓는) 환자를 치료할 가능성을 넓혀주는 길이기도 하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당시 에볼라 치료제로 개발 중이던 ‘렘데시비르’를 코로나 치료에 쓴 것도 약물 재창출의 대표적 사례다. 협심증 치료에 쓰이던 ‘비아그라’가 발기부전 치료제로 널리 쓰이게 된 것 역시 약물 재창출이다.
-약물 재창출의 장점은.
“신약을 처음부터 개발하면 통상 10~15년이라는 시간과 많게는 10억달러(약 1조3800억원) 넘는 비용이 든다. 하지만 약물 재창출은 이미 안전성이 검증된 기존 약물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개발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 물론 실험과 임상 시험 같은 후속 검증 절차는 필요하지만, 새로운 약물을 승인받는 데 시간도 훨씬 적게 든다.”
◇AI로 날개 단 약물 재창출
-약물 재창출에 AI를 도입한 계기는.
“허가된 약물만 해도 수천 종, 세계적으로 확인된 질병은 수만 가지에 달한다. 이 조합을 모두 분석하려면 종전 방식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그러던 중 머신러닝 분야의 전문가인 동창생 그랜트 미첼과 힘을 합쳤다. 우리는 ‘아예 비영리 조직을 만들어 제대로 해보자’고 뜻을 모았고, 그것이 약 3년 전이다.”
이에 페이겐바움 교수는 AI 머신러닝을 활용해 수천 가지 약물과 질병을 비교 연구하는 비영리 단체 에브리큐어(Every Cure)를 설립했다. 이 단체의 연구는 지난해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ARPA)에서 유효성을 인정받아 연구비 4800만달러(약 660억원)를 지원받았다.
-약물 재창출에 AI를 접목하면 장점은 뭔가.
“AI 도입 전에는 어떤 약을 어떤 질병에 써야 할지 찾는 과정이 거의 무작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AI 덕에 수많은 약물과 질병 데이터를 동시에 분석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조합을 우선순위로 도출할 수 있게 됐다. AI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약물 약 3000종 각각의 점수를 도출하고, 그 약물이 질병 2만가지 중 무엇에 효과를 보일지 예측한다. 예전에는 한 약물과 한 질병을 찾아내려 연구하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렸지만, AI를 사용하면 모든 조합을 단 몇 시간 만에 검토할 수 있다.”
-AI 기반 약물 재창출로 실제 환자를 살린 사례가 있다면.
“나랑 같은 캐슬만병 환자였는데, 어떤 약물도 듣지 않아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예정인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시도로 AI 알고리즘이 추천한 약을 투여했더니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고, 환자는 지금까지 2년 넘게 재발하지 않고 있다. 또한 지난해 ‘포엠 증후군’이라는 질환으로 손발 마비, 심장 비대 같은 증상이 나타난 환자가 있었다. 이 질환은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혈액암과 비슷한데, AI를 활용해 다발성 골수종에 자주 사용하는 약물 세 가지를 찾아냈고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암이나 자폐증 환자 연구도
-최근 주력하는 연구가 있다면.
“현재 가장 주목하는 후보 약물은 여섯 가지이며, 앞으로 이 목록은 늘어날 예정이다. 목록 중 하나는 마취제로 알려진 ‘리도카인’이다. 현재는 이를 각종 암 환자의 종양 주변에 국소적으로 주입했을 때 어떤 효과가 나는지 연구 중이다. 또 다른 유력 연구는 자폐증과 관련돼 있다. 일부 자폐증 환자의 뇌에는 엽산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도록 막는 항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우리는 엽산 차단을 우회할 수 있는 약물인 ‘루코보린’을 활용해 자폐 아동의 뇌에 엽산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언어적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