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주도하는 보호무역 흐름 속에서 세계무역기구(WTO)라는 다자 무역 질서의 중심축이 흔들린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WTO의 악연은 트럼프 1기 행정부(2017년 1월~2021년 1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WTO의 핵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상소 기구의 위원 선임을 거부하면서 상소 기구는 2019년 12월을 기점으로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WTO 상소 기구는 각국 무역 분쟁의 최종심(2심) 역할을 하는 기구로, 7명의 위원으로 구성돼야 한다. 그런데 미국은 2017년 8월부터 임기가 끝난 상소 기구 위원의 후임 선임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왔다. 급기야 2019년 12월부터는 상소 기구 재판부 구성에 필요한 최소 인원(3명)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2021년 취임한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역시 다른 WTO 회원국의 기대와 달리 자신의 임기 동안 WTO 상소 기구 위원 임명을 거부해 왔다. 이에 5년 넘게 WTO가 무역 분쟁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WTO 상소 기구가 무력화되면서 WTO의 구속력을 벗어난 자의적 무역 조치도 급증세다. 무역 전문 연구 기관 ‘글로벌 트레이드 얼러트’에 따르면 매해 5월 21일까지 새롭게 도입된 관세나 보조금 등 신규 보호무역주의 정책은 2019년 393건에서 올해 1153건으로 이미 세 배 가까이로 늘었다. 블룸버그는 2023년 8월 “세계 무역 중재 기구(WTO 상소 기구)가 마비되자 보호무역주의가 자리 잡는 모습을 목도하게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복귀는 WTO 정상화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트럼프와 그의 측근은 여전히 WTO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측근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2023년 6월 펴낸 책 ‘공짜 무역은 없다(No Trade is Free)’에서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을 “제네바(WTO 본부 소재지)에 있는 중국의 동맹”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을 상대로도 관세라는 칼날을 일방적으로 휘두르고 있는 트럼프가 WTO 상소 기구의 기능을 회복시켜줄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