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믹스드 바이 에리'

시드니 시빌리아 감독의 2023년 영화 ‘믹스드 바이 에리(Mixed by Erry)’는 1980년대 카세트 테이프에 음악을 무단 복제해 판매하면서 거부(巨富)가 된 삼 형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 포르첼라 출신인 이들 형제는 가짜 위스키를 만들어 파는 아버지를 도우며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삼 형제 중 가장 머리가 좋아 ‘집안의 천재’ 소리를 듣던 첫째 페페(주세페 아레나)는 길거리에서 밀수 담배를 팔아 푼돈을 벌었습니다. 막내 안젤로(에마누엘 팔룸보)는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이라 형을 괴롭히는 아이를 돌로 때리고 살인미수로 소년원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애칭이 에리인 둘째 엔리코(루이지 도리아노)는 가전제품 매장에서 잡일을 하며 용돈을 법니다. 에리는 자신이 믹싱한 테이프를 친구나 이웃에게 선물하곤 했는데, 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듭니다.

이들 이전에 불법 복제 테이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푼돈이라도 벌려는 건달들이 싸구려 녹음기로 녹음한 테이프를 거래했습니다. 선곡은 부실하고 음질은 조악했습니다. 하지만 에리는 음악 감각이 좋아 인기를 끌 노래를 미리 꿰뚫어 보고 테이프를 제작했습니다. 녹음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최신 장비를 사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고리대를 끌어다 쓰기도 했습니다. 에리의 믹싱 테이프가 동네에서 인기를 끌자 자신감이 생긴 형제는 사업을 더 크게 벌입니다. 녹음기 수백 대를 갖춘 작업실을 여럿 두고 대량생산에 들어갑니다.

믹스드 바이 에리는 테이프 생산 업체 대표 아르투로 바람바니(파브리치오 지푸니)의 눈에 띄었습니다. 바람바니는 이탈리아 고액 연봉 톱10에 들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지만 믹스드 바이 에리에 공테이프 납품 독점 계약을 맺고 이들과 의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믹스드 바이 에리의 인기는 계속 높아졌습니다. 1980년대 말에는 이탈리아 전체 음반 시장 점유율 27%를 차지하고, 앨범 판매량 1위에까지 올랐습니다. 심지어 믹스드 바이 에리를 카피한 테이프도 등장해서 ‘진짜 짝퉁’과 ‘가짜 짝퉁’ 사이의 경쟁이라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해적판 업체가 이 정도로 커지니 주요 음반사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정부에 단속 압박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바람바니는 형제에게 “이미 번 돈만으로도 대대손손 편하게 살 수 있으니 사업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에리가 거절하자 바람바니는 면책을 대가로 경찰에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형제는 체포돼 징역형과 함께 전 재산 몰수형에 처해집니다. 형제는 체포 전에 막대한 현금을 몰래 땅에 묻었는데 또 다른 시련이 닥칩니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 각국이 자국의 화폐를 폐지하고 유로화를 채택한 것입니다. 영화에선 이탈리아 패밀리 사업의 특징, 저작권법의 적용, 유럽의 화폐 통합까지 다양한 경제적 측면이 흥미롭게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