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디어든 감독의 1999년 영화 ‘갬블(The Rogue Trader)’은 영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상업은행인 베어링스은행의 파산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1762년 런던에 설립된 베어링스은행은 한때 전 세계 무역의 자금줄이었고,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일 때 중재까지 한 명문 은행이었습니다. ‘영국·프랑스·프러시아·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유럽의 6대 열강’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어링스 은행은 젊은 직원 닉 리슨(이완 맥그리거)의 파생상품 거래 실패의 여파로 1995년 파산했고, 단돈 1파운드의 금액으로 네덜란드 ING은행에 넘어가면서 232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졌습니다.
리슨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런던의 작은 은행에 취직해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베어링스 은행으로 옮긴 리슨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점으로 파견을 나가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유가증권을 정비해서 회사에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리슨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은행은 스물두 살의 그에게 싱가포르 거래소의 파생상품 거래를 맡깁니다. 리슨 팀은 좋은 실적을 냈는데 어느 날 팀원 중 한 명이 선물 매입 지시를 착각하여 반대로 매도하면서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냈습니다. 그 직원을 해고하고 본사에 보고하라는 상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리슨은 비밀 계좌를 만들어 손실을 은폐합니다. 작은 손실이니 다음번 이익으로 덮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계획대로 잘 처리되었습니다.
리슨은 이때부터 은행을 손쉽게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사의 승인을 받지 않은 위험한 투기 거래를 계속했습니다. 손실이 나면 비밀 계좌로 은폐하고 이익이 날 때까지 더 크게 베팅해서 손실을 메꾸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회사의 규정을 위반한 것이지만 리슨의 작은 팀이 회사 연간 수익의 10%인 1000만 파운드의 이익을 올리자 그는 영웅이 됐고 감사는 형식적으로만 진행되었습니다. 은행의 회계책임자가 리슨이 규정을 위반한다고 경계하자 한 투자책임자는 “무슨 엿 같은 규정 타령이야. 런던 금융가는 샌님들이 아니고 리슨 같은 친구들이 굴리는 거야”라고 하면서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행운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리슨이 공세적으로 사들인 일본 닛케이평균 선물이 6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고베 지진의 여파로 폭락하자 그는 상승에 더 크게 베팅했습니다. 하지만 주가는 리슨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였고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손실이 커졌습니다. 궁지에 몰린 리슨이 잠적한 후에야 은행은 거래의 실체를 파악하였습니다. 그가 야기한 손실은 무려 8억2700만파운드(1조4000억원)에 달했고 결국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슨은 체포된 후 싱가포르에서 4년 넘게 형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은행의 파산 책임을 리슨에게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의 잘못은 은행과 고객의 돈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규정에 반하는 위험한 거래에 나선 것입니다. 정상적인 은행이라면 그 거래에서 손실이 나든 이익이 나든 규정 위반으로 해당 직원을 징계해야 하고 재발을 막아야 했지만 베어링스 은행은 이익에 눈이 멀어 규정위반을 모른 척 눈감아 주고 막대한 보너스까지 챙겨주었습니다.
최근 국내 한 대형 증권사에서 직원들이 승인받지 않은 투기적 선물거래에서 발생한 1300억원이 넘는 손실을 은폐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베어링스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규정을 위반한 직원 뿐 아니라 회사 차원의 묵인과 내부통제 실패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