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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발트해에 면한 리투아니아는 독보적 레이저 강국으로 꼽힌다. 한 리투아니아 연구원이 레이저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리투아니아 경제혁신부

한반도의 3분의 1 크기, 중국으로부터 ‘쥐똥 같은 나라’란 치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자국 국토의 147배, 인구 494배인 중국에 대담하게 맞선 나라가 있다. 바로 폴란드의 이웃국, 유럽 발트해에 면한 리투아니아다.

이 자존심 센 나라의 비밀 병기는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이라는 정밀 레이저다. 리투아니아 레이저 기술력은 전 세계에서도 독보적이란 평가다. 지난달 30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의 빌뉴스대학교 레이저연구센터에서 만난 달리아 카스켈리테 레이저연구센터장은 “곧 있으면 광공학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학회인 국제광전자공학회(SPIE)에서 주최하는 프리즘 어워드 시상식이 열린다”며 “혁신적인 제품을 연구·생산하고 있는 리투아니아 기업이 수상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해당 시상식은 SPIE에서 인류 발전에 기여한 첨단 기술 제품을 매년 선정하는 행사로, 관련 업계의 최고 영예로 여겨져 ‘레이저계의 오스카’로 불린다. 실제로 사흘 뒤인 지난 2일 리투아니아 기업 에크스플라(Ekspla)가 산업용 펨토초(1000조분의 1초) 레이저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이저 부문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지난달 31일 빌뉴스에서 만난 케스투티스 야시우나스 Ekspla 이사장은 “21세기는 전자의 시대였다면, 22세기는 (레이저를 이루는) 광양자(Photons)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31일 수도 빌뉴스 에크스플라(Ekspla) 사무실에서 케스투티스 야시우나스 이사장이 본지와 인터뷰하는 모습. /김나영 기자

◇레이저는 ‘최첨단 맥가이버 칼’

리투아니아는 인구 270만명인 발트해 소국(小國)이지만, 레이저 분야에서 독보적인 강국이다. 리투아니아 국립 빌뉴스대는 미국 물리학자들이 발명한 레이저를 1966년 세계 최초로 조사(照射·내리쬠)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레이저 산업을 국가 산업으로 육성해 온 리투아니아는 현재 전 세계 80여 국에 레이저 관련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는 미 항공우주국(NASA),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매사추세츠공대(MIT), 애플 등 전 세계 내로라하는 기업이나 연구기관 등에 레이저 기기 및 관련 기술을 제공한다.

흔히 ‘광선빔’으로 알려져 있는 레이저는 오늘날 첨단 산업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꼽힌다. 레이저 광은 유도방출로 빛을 증폭시킨 것으로, 빛이 퍼지거나(동파장) 어긋나지(동위상) 않고 일직선으로 쭉 뻗는다. 이처럼 단일 파장으로 접속하는 레이저 빛은 단위면적당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등 조작에 용이해 각종 물질을 정교하게 가공하는 데 효과적이다. 예컨대 스마트폰이나 TV 디스플레이 등에 들어가는 수십만 개의 반도체나 유리 등의 부품은 모두 레이저로 자른다. 레이저를 광원으로 활용하는 광화학은 광통신, 광의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널리 적용된다. 쉽게 비유하자면 오늘날 레이저는 최첨단 ‘만능 맥가이버 칼’인 셈이다.

리투아니아가 개발한 레이저 시스템에서 레이저광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나가는 모습. /리투아니아 경제혁신부

◇레이저와 반도체

리투아니아는 배짱이 두둑한 나라다. 제정 러시아, 소련 시절 러시아에 두 번 점령당한 나라이지만, 지난 1월 거대한 이웃 러시아에 맞서 러시아 본토와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로를 봉쇄해 러시아를 격분하게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두 달 만인 2022년 4월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가장 먼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이뿐 아니다. 지난해 11월 리투아니아는 수도 빌뉴스에 대만의 외교 공관인 ‘대만대표부’를 신설했다. 중국과 수교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대만과의 비공식 교류를 위해 대사관 역할을 하는 대표부를 두고, 통상 ‘대만(Taiwan)’ 대신 수도인 ‘타이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유럽 전역에 걸쳐 18년 만에 리투아니아 땅에 대만대표부가 들어선 것이다. 중국 평론가들이 리투아니아를 ‘쥐똥 같은 나라’라고 모욕적 언사를 한 이유다. 리투아니아가 이처럼 할 수 있던 건 나토(NATO)와 EU 회원국이란 뒷배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대만과의 경제 관계가 반도체·레이저로 서로 얽혀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대만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있는 나라로, 양국은 지난해 9월 타이난에 대만·리투아니아 초고속 레이저 개발 센터를 설치하는 등 협력을 가속하고 있다.

더구나 리투아니아의 레이저 산업은 외부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 독자 생태계를 갖췄다는 설명이다. 현재 리투아니아에는 60여 개 레이저 기업이 있는데, 이들 기업은 저마다 분업을 통해 각종 광학 부품과 공작기계를 만들고, 최종 완제품까지 만들어서 해외에 수출해내는 구조를 갖췄다. 리투아니아레이저협회(LLA) 게디미나스 라시우카셔스 회장은 “레이저 업계의 전체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는 덕분에 ‘무역 보복’과 같은 외부 위협 요인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래픽=김의균

◇“한국과의 협력도 기대”

리투아니아의 레이저 기술 경쟁력은 활발한 산학 협력 덕분이기도 하다. 현재 리투아니아에는 5개의 레이저 연구 대학 및 기관이 있으며, 200여 명의 과학자와 1800명의 전문 인력이 레이저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국가 규모가 작은 탓에 인력풀이 크지 않아 대부분이 동문이거나 동료로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또한 LLA 등과 같은 기관이 매년 다양한 교류 활동을 마련해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자리를 제공한다. 기업에서도 적극적으로 학계의 최신 연구를 습득한다. 레이저 기계 제조 회사인 아코니어(Akoneer)의 로카스 슬레키스 CEO는 “우리 회사의 CTO(최고기술책임자)는 한 연구기관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계와 협력하는 일이 잦다”고 설명했다.

리투아니아의 다음 과제는 한국 등 외국 기업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라시우카셔스 LLA 회장은 “한국이 발트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할 계획인 것으로 안다”면서 “올해 빌뉴스에 주리투아니아 한국 대사관이 세워지는 등 양국이 교류할 수 있는 여건이 나아져 앞으로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리투아니아를 방문했다. 당시 회담을 가진 양국 정상은 레이저 분야를 포함한 첨단산업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와 주리투아니아 한국 대사관 개설 등을 약속했다. 한국과 리투아니아는 1991년 수교해 올해로 수교 33주년을 맞는다.

그래픽=김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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