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외교부 직원 익명 게시판(소통 광장)에 ‘업무 시간 외 전화 카톡’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퇴근 후 사무실 번호로 전화가 왔길래 개인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받지 않았더니 카톡(카카오톡)으로 욕을 먹었다”며 “내일 출근해서 이야기해도 전혀 문제없는 내용이라 참다 못해 카톡 프로그램을 지우고 상사에게 ‘카톡 사용 안 한다’고 하자 상사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카톡을 다시 깔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놓고 직원 간 공방이 벌어졌다. ‘공감’을 누른 사람이 95명, ‘비공감’을 누른 사람도 53명이나 됐다. 댓글도 45개 달렸다. 2020년 입사한 한 직원은 “비공감 수를 보니 이런 행태를 보이는 분들 꽤 되나 보다. 망신당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라”고 적었다. 또 다른 직원은 “새벽 5시에 자기가 석 달 후 휴가 간다고 메시지 보내는 자(상사)도 있다“고 했다. 반면 비교적 고참급인 2007년 입사자는 “급한 일이었으면 어쩌려고 전화 안 받아요?”라고 글쓴이를 비판했다.
재택근무 확대로 일과 생활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퇴근 시간 후 연락을 둘러싸고 회사와 직원 간, 선후배 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업무 시간 외 연락 금지를 아예 법으로 못 박는 나라도 늘고 있다.
◇“굳이 이 시간에” vs “일이 먼저”
일과 삶의 구분이 뚜렷한 젊은 세대에게 퇴근 후 날아오는 메시지는 큰 스트레스다. 구직 사이트 인크루트가 지난해 직장인 10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83%가 퇴근 후 업무 관련 연락을 받아본 적 있다고 답했다. 19%는 연락이 와도 아예 답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다 지난해 퇴사한 30대 남성은 “상사가 ‘내일 출근해서 보고서에 어떤 내용을 포함하라’는 메시지를 시도 때도 없이 보냈다”며 “불편할 뿐만 아니라 ‘나는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후배인 너는 이 시간에 편하게 쉬느냐’는 뜻으로 읽혀 참다 못해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반면 밤늦게 연락하는 상사들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외국계 금융사 임원인 박모(47)씨는 “내가 젊었을 때는 ‘다음 날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선배가 아이디어를 던져줘서 고마웠던 적이 많았다”며 “획일적으로 무조건 연락하지 말라는 건 맞지 않는다고 본다”고 했다. 한 회계법인 간부급 인사는 “밤에 업무 지시를 위해 불가피하게 이메일을 보낼 때도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다음 날 오전 발송되도록 예약을 걸어둔다”며 “예약 전송 시간도 9시 2분, 8시 58분 식으로 매일 바꾼다”고 했다. 인사·조직 컨설팅 회사 ‘콘페리’ 이종해 전무는 “주52시간제나 PC오프제 등으로 업무 시간이 줄면서 퇴근 이후 시간의 의미를 두고 MZ 세대와 선배 세대 간 견해 차가 더욱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단절될 권리’ 법으로 못 박는 나라들
퇴근 후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전화나 문자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건 한국 직장인만이 아니다. 남호주대 에이미 자도 박사팀이 호주의 40개 대학 직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1%는 퇴근 후 업무 때문에 직장 동료와 연락하며, 30%는 주말에도 일 때문에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주고받는다고 답했다. 그런데 업무 시간 외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비율이 25%포인트 더 높았다.
이 때문에 ‘업무 시간 이후 연락 금지’를 법으로 명문화하는 국가들도 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 2016년 일찌감치 일명 이른바 ‘로그오프법’을 만들어 2017년부터 시행 중이다. 직원 수가 50명이 넘는 회사 근로자는 퇴근 후 이메일, SNS 메신저, 회사 내부 전산망 등을 통한 상사의 연락에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사회는 비교적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다 보니 회사가 직원 개인 전화번호를 모르는 경우도 많지만, 이메일과 메신저 등으로 퇴근 후 연락하는 일이 잦아지자 정치권이 이런 법을 마련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의회도 2021년 말 이른바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를 법제화했다. 이에 따라 올해 3월부터 직원 수가 25명이 넘는 회사는 업무 시간 외에 이메일·전화 통화·화상회의 등을 할 수 없다. 포르투갈도 2021년 집권 사회당 주도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근무시간 외 직원 간 연락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는 ‘고용주는 직원의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를 위반할 경우 회사에 벌금을 물리는 조항이 담겼다.
벨기에도 6만5000명에 이르는 연방공무원을 대상으로 근무 시간 외에 상사의 전화나 이메일에 답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법을 시행 중이다. 호주 퀸즐랜드주도 교사를 대상으로 ‘디지털 해독제(digital detox)’라 불리는 규정을 만들어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다. 교사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방과 후 동료 교사나 학부모·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탈리아, 벨기에, 스페인, 아일랜드 등도 비슷한 법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지난해 의회에서 발의돼 논란이 진행 중이다. 직원 수가 10명 이상인 기업은 업무 시간 외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직원과 노조에 알려야 하고, 이를 어기면 4000달러 벌금이 부과된다는 내용이다. 이 법안에 대해 케냐 고용주연맹은 “기업의 자율성을 저해하며, 저숙련 서비스 업종 등에서 종사하는 청년과 여성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반발했다.
◇미국은 조용, 한국도 번번이 좌절
유럽에 비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지난 2018년 뉴욕시 의회가 관련 조례를 제출했지만 통과되지 않았고, 이후로는 정치권에서 별다른 이슈가 되지 않는다. 한 인사 전문가는 CBS에 “미국 직장인들이 유럽인보다 개인적이고 기업가 정신이 강한 데다 직장 내 경쟁도 더 치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도 업무 시간 외 연락을 막는 법은 없다. 지난 2016년 민주당 신경민 의원, 2020년 민주당 송옥주 의원, 지난해 민주당 노웅래 의원 등이 근로 시간 외 업무 지시를 반복하면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의 법안을 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다만 현행 근로기준법이 ‘직장 내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어 그 정도가 과할 경우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은 “업무 시간 후 과도하게 지시를 하거나, 업무에 따른 수당을 주지 않을 경우에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 인정돼 처벌받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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