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조금씩 사라지는 동안 제조기업과 유통업체에는 ‘재고(在庫)’라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팔지 못한 물건들로 창고가 가득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세계 주요 2300개 제조업체의 재고는 약 1조8700억달러(2420조원)로 작년 12월 말보다 약 970억달러(약 125조원) 증가했다.

쌓이는 재고에 기업은 울상이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지갑이 얇아진 국내외 소비자들에겐 조금이나마 싸게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다. 국내외 유통업체들이 재고 부담을 덜기 위해 대규모 할인에 나섰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야외 활동이 많아지고 경기가 위축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TV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디스플레이 패널 재고가 늘고 있다. 서울 시내 한 대형 마트에 TV가 진열돼 있다. /뉴스1

◇쌓이는 재고에 기업들 울상

코로나19가 막 유행을 시작한 2020년 1월부터 20개월 동안 미국의 기업 재고 증가율(전월 대비)은 1%를 넘은 적이 없었다. 7개월간은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2020년 5월에는 2.3%나 감소했다. 재고가 쌓일 틈 없이 물건이 팔려 나갔다는 의미다.

올해 들어 상황이 크게 변했다. 매달 재고 증가율은 1%를 넘었고, 3월에는 2%를 기록하기도 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 기업이 보유한 도매·내구재·의류 재고 규모는 약 8000억달러(약 990조원)에 이른다. 코로나19 발발 이전 수준 약 7000달러보다 1000억달러 많다.

올해 1분기 월마트, 타깃 등 미국 S&P 500에 속한 유통업체들의 재고 금액은 448억달러(약 57조9000억원)로 지난해보다 26% 늘었다. 타깃의 재고 규모(4월 말 기준)는 151억달러로 1년 전 대비 43% 늘었고, 월마트는 25% 증가한 599억달러(2분기 기준)에 달했다. 세계 최대 전자제품 판매점인 ‘베스트바이’도 지난 1분기 기준 재고회전일수(보유한 재고가 매출로 발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는 74일로 예년(60일)보다 크게 늘었다.

전미소매업연맹 마크 매슈스 부사장은 “기업들은 과거 소비자 행태에 근거해 예측하고 3개월, 6개월 혹은 9개월 전에 상품을 미리 주문한다”며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닥쳤을 때 관련 정보가 없다 보니 예측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이 내놓은 미국의 품목별 재고 액수를 보면 자동차 분야는 지난해 1월 47억3500만달러에서 올해 6월 64억6100만달러로 증가했고, 컴퓨터·전자제품은 같은 기간 489억7900만달러에서 520억7000만달러로 늘었다. 이 밖에 가전제품은 24억4100만달러에서 33억9500만달러, 플라스틱·고무 제품은 112억3500만달러에서 137억600만달러로 증가했다.

쌓이는 재고에 골머리를 앓는 건 제조업체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PC나 스마트폰 같은 전자 제품은 갑작스러운 수요 감소로 재고가 급증했다. 가령 삼성전자의 재고자산 총액은 약 52조원으로 사상 처음 50조원을 넘어섰고, SK하이닉스도 작년 하반기보다 재고가 33% 늘어난 11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반도체 제조업 재고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79.8%로 2016년 4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값 된 그래픽카드

국내외 유통업체들은 대규모 할인으로 재고 떨이에 나섰다. 월마트의 경우 제품 1만여 종의 가격을 인하했다. 아카시아 목재로 제작된 정가 350달러짜리 야외 라운지 의자는 250달러에, 12달러짜리 어린이용 잠옷은 9달러에 판다. 아이들이 집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제작된 트램펄린은 1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모두 코로나 팬데믹 때 많이 팔렸던 품목들이다.

재택근무나 원격 수업 등으로 판매량이 늘었던 전자 제품도 가격이 30% 이상 떨어졌다. 정가 399달러짜리 애플와치 7시리즈는 279달러에 세일 중이고, 애플의 에어팟은 159달러에서 100달러, 주방에 쓰이는 식기 선반은 60달러에서 46달러로 각각 가격이 떨어졌다. 음식 조리 기구인 에어프라이어는 149달러짜리를 110달러에 할인 판매 중이다. 오하이오주에 있는 할인 소매업체 ‘홈바이스’는 유명 브랜드의 세탁기와 건조기를 정가보다 40% 할인된 가격에 내놓기도 했다.

국내 면세점 업계도 코로나19 여파로 다 팔리지 못한 화장품 가방 등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할인 행사를 열었다. 신세계면세점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화장품, 향수 등을 40%에서 최대 70%까지 할인했고, 롯데면세점도 ‘면세점 위크’를 통해 명품 여름 샌들과 주얼리 등을 최대 80% 낮은 가격에 판매했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가격과 수요가 급등했던 그래픽카드도 가격이 급락 중이다. 그래픽카드는 가상화폐 채굴에 쓰이다 보니 가상화폐 열풍에 힘입어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가령 인기 제품인 RTX 3080의 경우 출시가(약 700달러)의 3배에 육박하는 2000달러에 중고 시장에서 거래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성능 컴퓨터 게임을 위해 그래픽카드가 필요한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갔다.

그런데 올 들어 가상화폐 채굴자들이 중고 시장에 내놓는 그래픽카드가 늘어나고 재고가 쌓이면서 가격이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연초 1700달러대였던 가격은 5월 들어 1000달러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7월에는 700달러대로 내려왔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그래픽카드는 최근 2년간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최근에는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며 “이제 게임을 위해 그래픽카드가 필요한 소비자들은 시장 가격에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고 증가는 공급망 교란을 해소하는 데도 다소 도움이 된다. 지난해 초부터 벌어진 반도체 부족 사태로 전 세계 자동차 회사는 차량용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소비자가 주문 후 길게는 1년 반이나 기다려야 신차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최근 반도체 수요가 줄고 재고가 늘어나면서 차량용 반도체 수급에도 숨통이 트였다. 이에 따라 지난 3~7월 생산 계획을 하향 조정했던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최근 생산 계획을 재조정해 9월에는 월 85만대를 회복하고, 10월 이후엔 월평균 90만대 이상을 생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대차도 생산 목표를 연초보다 상향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숫자는 공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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