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임모(43)씨는 거실 서랍 한구석에 30㎝ 길이의 스피커를 2년째 방치 중이다. 구매 초기엔 ‘XX야’라고 부르면 푸른빛이 감돌면서 ‘네 말씀해주세요’라고 답하는 게 신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이 가지 않았다. 임씨는 “작동시키려고 말을 크게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때로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찾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개인 비서’라 불리며 한때 ‘인류의 생활 패턴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까지 받았던 인공지능(AI) 스피커(스마트 스피커) 인기가 눈에 띄게 시들해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AI 스피커가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을 거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춤하는 AI 스피커 시장
미디어 컨설팅 업체 제이컵스의 테크서베이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AI 스피커 보유자는 지난해 35%로 전년 대비 2%포인트 늘어나는 데 그쳤다. 2017년 11%, 2018년 21%, 2019년 27%, 2020년 33% 등 비약적인 증가세가 둔화된 것이다. 마케팅 조사 업체 시빅 사이언스 조사에서는 지난 4분기 현재 미국 소비자 39%가 AI 스피커를 보유 중인 것으로 조사됐는데, 향후 구매할 의향이 있다는 사람은 10%에 그쳤다. 51%는 구매 의향이 없거나 들어본 적도 없다고 답했다. AI 스피커를 보유한 소비자 중에도 매일 사용한다는 사람(26%)보다 거의 또는 전혀 사용 안 한다는 사람(29%)이 더 많았다. 조사 업체는 “AI 스피커 시장이 정체기에 접어든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밝혔다.
AI 스피커 인기가 예년만 못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기능에 큰 변화가 없고,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 등 다른 기기들이 진화하면서 입지가 좁아진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컨슈머인사이트가 2020년 하반기 우리나라 AI 스피커 이용자 4300여 명에게 용도를 물어보니 날씨나 미세 먼지를 검색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52%로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음악을 검색하거나 듣기 위해서(46%), TV를 제어하기 위한 목적(43%)으로 이용한다고 답했다.
미국 IT 전문 매체 더 버지도 “아마존 알렉사가 2014년에 출시된 지 5년 뒤에 나온 모델은 2014년 것보다 못했다. 음악이나 타이머 등 아마존이 자랑한 고급 기능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입수한 아마존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AI 스피커를 산 뒤 약 3시간만 지나면 모든 기능의 절반 이상을 발견하고, 1주일이 지나면 더는 손을 뻗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15~2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한 통신사 관계자는 “스마트폰은 계속 다양한 모델이 개발되고 있고, 떨어트려서 깨지거나 잃어버리면 또 사야 한다. 그런데 AI 스피커는 디자인이나 성능이 크게 바뀌지도 않고 거의 잃어버리지도 않아 한번 사면 오래 쓰게 된다. 시장이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AI 스피커가 가족 간의 대화를 엿듣고 수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AI 스피커 구매를 꺼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시빅 사이언스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AI 스피커를 구매하지 않는 이유로 ‘쓸모없음’과 함께 ‘사생활 침해 우려’를 가장 많이 꼽았다.
그러다 보니 마이크로소프트(MS)는 AI 스피커 시장에서 아예 발을 빼는 분위기다. MS는 음성인식이 가능한 개인 비서 소프트웨어 ‘코타나(Cortana)’를 2014년 개발한 뒤 한때 애플·구글과 함께 ‘빅4′로 불릴 만큼 AI 음성인식 시장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AI 스피커 판매가 저조하자 대다수 기능을 단계적으로 차츰 축소했고, 작년 3월 애플과 구글 애플리케이션(앱) 지원을 종료했다.
◇발전 더딘 AI 비서… 위험한 놀이 추천도
AI 스피커의 핵심 기술인 AI의 발전이 더딘 것도 한몫했다. AI 스피커를 제작하는 한 통신사 관계자는 “소비자들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기기를 원하지만, 아직 업계가 가진 기술은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다 보니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근에는 AI 스피커가 위험한 조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위험성 논란까지 일었다. 미국 CNN 등에 따르면 작년 말 영국의 한 10세 소녀는 집에 있는 아마존 알렉사에 도전해볼 만한 게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알렉사는 “휴대전화 충전기를 벽면에 있는 콘센트에 반쯤 꽂고 나서, 꽂히지 않은 부분에 1페니짜리 동전을 갖다 대보라”고 답했다. 알렉사가 인터넷에서 ‘챌린지(도전)’를 검색해 한때 SNS를 통해 유행한 위험한 놀이인 ‘페니(동전) 챌린지’를 아이에게 추천한 것이다. 다행히 함께 있던 소녀의 엄마가 막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아마존은 성명을 내고 “해당 오류를 인지하자마자 바로잡았다. 알렉사가 다음부터 이번과 같은 위험 행동을 권하지 않도록 업데이트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업체들도 AI 스피커 시장에 대한 열의가 식은 모습이다. 2016년 AI 스피커 ‘누구’를 처음 출시하고 2019년 4번째 버전인 ‘누구 네모’를 내놓은 SK텔레콤은 이후 아직 신제품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KT는 작년 6월 ‘기가지니3′를 내놓았는데, 2018년 기가지니2 출시 이후 3년 만이다. 업계 관계자는 “AI 스피커는 한번 사고 나면 더 좋은 제품이나 디자인을 사려는 동기가 잘 생기지 않다 보니 신제품 출시 동기가 낮다”며 “스피커보다는 음성인식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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