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차량 공유업체 인도네시아 '고젝'의 오토바이 운전 기사들이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고젝(Gojek)

지난달 말 서울 마포에서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 주최로 국내 스타트업의 동남아시아 진출 전략 세미나가 열렸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참석 기회를 얻은 10여 명의 스타트업 대표는 연사로 나선 싱가포르 VC(벤처캐피털) 알로이스(Alois)벤처스 유청연 대표의 말을 받아 적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날 유 대표는 10년 가까이 동남아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쌓은 실전 노하우를 전수하며 “글로벌 VC와 PE(사모펀드)들이 최근 동남아 스타트업 수백 곳에 수조원을 투자하는 ‘붐’이 일고 있다”며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타트업 대표들의 질문이 쏟아지면서 세미나는 예정된 시각을 훌쩍 넘겨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아이 돌봄 및 교육서비스 매칭 플랫폼을 개발해 작년 말 베트남에 진출한 야호랩 권영욱 대표는 “동남아는 디지털에 친숙한 젊은 부부가 많고, 경제도 급성장하고 있어서 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동남아 지역이 최근 글로벌 스타트업 시장의 ‘메카’로 급부상하고 있다. 올해 들어 동남아 스타트업들이 잇따라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에 등극하면서 투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모습이다. 싱가포르 매체 딜스트리트아시아에 따르면 동남아에서는 지난 1~10월에만 15개의 유니콘이 탄생했다. 지난 1~9월 동남아 스타트업들이 유치한 투자금은 172억달러(약 20조원)로 작년 한 해 동안 유치한 자금(85억달러)의 2배가 넘는다. 인구 7억명의 거대 경제블록(아세안)이라는 점, 디지털 환경에 친숙한 젊은 층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 온라인 플랫폼 사업에 최적화된 지역이라는 점이 동남아를 스타트업 ‘허브’로 자리매김하게 한 핵심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동남아 진출에 대한 환상이 커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현지 투자 풍토와 국가별 문화 특성에 대한 이해가 낮은 상태에서 섣불리 뛰어들었다 큰 실패를 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WEEKLY BIZ가 동남아 스타트업 열풍의 배경과 현주소를 파헤쳐봤다.

◇동남아, ‘유니콘’ 급증하며 투자 폭발

동남아(Southeast Asia)라 하면 보통 2015년 출범한 ‘아세안(Asean) 경제 공동체’에 속한 국가들을 의미한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 10국이다. 하지만 경제·산업적 측면을 분석할 때는 보통 GDP(국내총생산) 규모와 인구 수 등을 고려해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브루나이를 뺀 나머지 6국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주요 6국은 동남아 전체 인구(6억7779만명)의 87%, GDP의 96%를 차지하고 있다.

스타트업 관련 글로벌 통계 사이트 스타트업랭킹에 따르면 동남아 주요 6국에는 현재 4217개의 스타트업이 있다. 미국(7만217개)과 인도(1만2069개), 영국(6063개)에 이은 세계 4위 규모다. 한국(338개)의 12배, 중국(614개)의 7배에 달한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유니콘 기업도 급증하는 추세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에 따르면 동남아 주요 6국에는 싱가포르(15개)와 인도네시아(11개)를 중심으로 총 35개의 유니콘이 있다. 유니콘 순위도 미국(400개), 중국(158개), 인도(38개)에 이은 4위다.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모두 글로벌 스타트업 ‘빅4′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동남아에서는 지난 2013년 첫 유니콘(싱가포르 ‘라자다’)이 나온 후 작년까지 7년간 19개의 유니콘이 배출되는 데 그쳤지만, 올해에만 15개의 유니콘이 탄생할 만큼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작년 필리핀·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5국에서 택배 분야 1위에 오른 인도네시아의 J&T익스프레스, 동남아 최대 중고 거래 플랫폼인 싱가포르의 캐로셀, 말레이시아 중고차 거래 플랫폼 카섬, 태국 재계 1위 CP그룹의 핀테크 자회사 어센드머니 등이 모두 올해 유니콘이 된 스타트업들이다. 탄탄한 경쟁력을 갖춘 스타트업이 끊임없이 나오면서 창업 초기 기업을 유니콘으로, 유니콘을 데카콘(기업 가치 10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글로벌 큰손들의 자금도 앞다퉈 동남아로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 센토벤처스에 따르면 올 상반기 동남아에는 총 393건의 스타트업 투자가 이뤄졌는데 이는 종전 최고치인 2019년 상반기(375건)보다 20건 가까이 많은 것이다. 투자 금액도 9월 말 기준 172억달러(약 20조원)로 이미 작년(85억달러)의 2배를 넘어섰다. 2019년(60억달러)과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많다. 태국 방콕의 VC인 탑벤처스의 럭 사라야 상무는 “동남아 스타트업이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하고, 급성장세를 보이자 고용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보다 스타트업을 선호하는 인재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젊고 거대한 경제권

동남아 ‘스타트업 붐’의 주요 배경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동남아가 ①고성장으로 소득 수준이 빠르게 늘어나는 지역이면서 ②동남아 주요 6국이 6억명에 가까운 거대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고 ③인구 10명 중 6명가량이 34세 이하인 전 세계에서 가장 ‘젊은’ 지역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동남아 주요 6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019년 기준 4830달러(약 574만원)로 중진국 수준(1인당 GNI 4046달러 이상)까지 올라섰다. 인도(1900달러)의 2.5배에 달한다. 동남아 주요 6국의 지난 10년(2010~2020년)간 연평균 GNI 증가율은 4%로 세계 평균(2.3%)을 크게 웃돈다.

소비 여력이 어느 정도 생긴 가운데 6억명에 가까운 거대 인구의 57%(작년 기준)가 34세 이하라는 점은 온라인 기반 스타트업들이 뿌리를 내리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평가다. 10대를 비롯해 2030 세대는 디지털 환경에 친숙해 앱 형태의 새로운 서비스가 출시됐을 때 거부감이 적어 중장년층이나 노년층보다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 주요 6국의 평균 중위 연령은 33.3세로 일본(48세), 독일(46세) 등의 선진국보다 열 살 넘게 어리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지난 10월 발간한 동남아 시장 보고서에서 “청년층 중심의 인구 구조와 중산층 증가, 펀드 자금 유입 급증을 비롯해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과 인터넷 사용률은 동남아 스타트업 성장의 근간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발표된 구글·테마섹·베인앤드컴퍼니 공동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동남아 주요 6국의 인터넷 사용자 수는 4억4000만명으로 2019년(3억6000만명)과 작년(4억명) 대비 크게 늘었고, 인터넷 사용자 10명 중 8명(3억5000만명)은 온라인에서 물건을 사 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작년 기준 동남아 주요국의 스마트폰 침투율은 100%를 넘는다. 동남아 주요 6국의 인터넷 경제 규모는 2025년에 3000억달러(약 360조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인프라 및 사용자 증가율이 워낙 높다 보니 동남아 유니콘의 절반가량(46%)은 온라인 기반의 핀테크와 이커머스 부문에 집중된 상태다.

◇규제, 물가 등 여러 이점 누리는 동남아

신사업에 대한 규제가 심하지 않고, 스타트업에 우호적인 정책이 많은 것도 동남아가 세계 곳곳에서 찾는 ‘스타트업 맛집’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2018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미용 시술 플랫폼’ 써밋츠의 황유진 대표는 “한국에서는 원격 진료와 의료 및 미용 시술 서비스에 대한 온라인 사전 결제가 불가능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가능해 사업 확장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유학파 출신의 젊은 동남아 창업자들이 미국이나 중국에서 검증을 마친 사업 모델을 현지화해 좋은 반응을 얻고, 능숙한 영어 구사로 해외 투자자로부터 원활하게 투자금을 유치하는 선순환 구조도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 MIT를 졸업한 뒤 글로벌 통신장비 업체 시스코(Cisco)에서 근무한 우끄릿 우나할레카가 지난 2016년 설립한 태국 애그테크(AgTech·농사와 테크를 합친 말) 스타트업 리컬트가 전형적인 예다.

이 밖에 물가가 저렴해 적은 마케팅 비용으로 거대 플랫폼을 만들기 수월한 점, 성공적 상장과 인수합병 사례가 늘면서 투자금 회수(엑시트)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점, 중국 정부의 기업 규제에 따른 반사이익이 커진 점 등도 동남아를 ‘스타트업 천국’으로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CAC(1명의 신규 고객 유치에 드는 비용)가 6만원 정도인데 인도네시아는 4만원, 베트남은 1만원밖에 안 된다”며 “같은 돈으로 훨씬 효율적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출 시 꼼꼼한 현지 조사 필수...국가별 특성 잘 파악해야”

동남아가 ‘기회의 땅’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스타트업도 동남아 진출의 문을 적극적으로 두드리고 있다. 스타트업 지원기관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해외 진출을 고려하는 창업자 중 동남아를 1순위로 삼은 비율은 25.6%로 미국(39%)에 이어 둘째로 많았다. 하지만 동남아 전문가들은 한류(韓流) 열풍에 기대 동남아 시장을 국가·지역별로 철저히 분석하지 않고 진출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세안 경제 전문가인 고영경 말레이시아 선웨이대 경영대학 겸임교수는 “창업 아이템이 현지에 정말 없는 것인지, 있다 해도 충분히 경쟁 우위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진출했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며 “웬만한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서비스는 대부분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인종, 종교,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지역에 무리해서 진출하느니 적당한 규모의 괜찮은 현지 업체를 인수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벤처 투자가 활발하다는 얘기만 듣고 투자 유치가 수월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현지 VC는 비(非)동남아 지역 업체에 대한 투자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고, 국내 스타트업이 현지 창업자들을 제치고 주목받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국가별 특성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베트남은 한국 투자자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시장이지만 베트남 소비자들은 정당한 수수료를 내거나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인색한 편이다. 영어와 베트남어 기반의 한국어 회화 연습 앱 TEUIDA(트이다)를 운영하는 장지웅 대표는 “동남아가 뜨거운 시장이고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도 맞지만, 아직 소득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어서 유료 서비스 이용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는 해외 기업에 대한 관세가 높고, 브랜드 충성도보다는 인플루언서나 지인 추천 의존도가 높은 편이라고 한다. 태국은 직접 소비자를 상대하는 B2C보다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B2B(기업 간 거래) 모델이 유망하다는 조언이 많았다. 동남아 대부분 국가가 환율 변동이 심한 편이므로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싱가포르에 ‘자금 관리’ 목적의 연락 사무소를 내는 것도 방법이다.

동남아에 진출한 국내 스타트업 중 가장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게임 아이템 거래 플랫폼 파이브잭의 김성진 대표는 ”한국에서 성공한 사업 모델을 동남아에 그대로 가져가면 실패할 확률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 100만명 넘는 활성 이용자를 보유한 파이브잭은 최근 인도네시아 유니콘 부칼라팍에 수백억원대에 매각됐다. 김 대표는 “현지 문화를 정말 잘 알고, 뚜렷한 기회가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면 한국을 떠나 동남아에 올 필요는 없다”며 “동남아에서 사업하려면 현지인 공동 창업자를 찾거나 현지 기업을 조력자로 구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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