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과 물류 문제를 헤쳐나가기까지 참고 기다려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전기차 제조 업체 테슬라는 올해 3분기 역대 최고 인도량 달성을 자축하며 최근 고객들에게 이 같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테슬라는 전년 동기 대비 10만2000대(73.2%) 늘어난 24만1300대를 3분기에 인도했다. 올 들어 9월까지 고객들에게 전달한 자동차 대수는 총 62만7000대로,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전 세계 자동차 제조 업체들이 1년 넘게 반도체 칩 공급난 때문에 생산·납품에 차질을 빚는 상황에서, 차량 한 대당 1000개 넘는 반도체를 쓰는 전기차 회사는 100~300개의 반도체를 쓰는 내연 기관 자동차 회사보다 고충이 훨씬 더 심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테슬라는 ‘보통’도 아니고 ‘최우수’ 성적을 내고 있다. 미국 일각에선 ‘사기 아니냐’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일제히 이유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설계 구조 교체, 단순한 공급망 주효
테슬라도 수개월 전부터 공급난에 큰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에 2분기부터 한 가지 대책을 세워 시행해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바로 ‘차량 소프트웨어 재설계’다. 미국 IT 전문 매체 더버지(The Verge)는 “테슬라가 차량에 다른 반도체를 조달(sourcing)하고 사용 불가능한 칩을 대체해 작동하도록 소프트웨어를 다시 만들었다. 반도체 공급난을 부분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했다.
전자 제품의 두뇌 역할을 하는 MCU(마이크로 컨트롤러 유닛) 같은 특정 반도체 칩이 공급난에 시달리자, 다른 회사의 MCU를 쓸 수 있도록 설계를 바꿨다는 얘기다. 예컨대, 모델S의 경우 파워트레인과 터치스크린 등이 재설계됐다고 한다. 테슬라 창업자 겸 CEO 일론 머스크는 “새 칩을 찾아 새 펌웨어를 만들고 차량에 통합하고 테스트하는 일은 정말 격렬하고 힘들었다”고 했다.
테슬라의 경우 특히 차량 모델 종류가 많지 않고, 통합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덕분에 대체품으로 버티기에 유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일반 자동차의 경우 차량 곳곳에 각각의 제어 반도체가 필요하고, 이 반도체를 납품하는 업체도 모두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일반차 회사들은 차종도 수십 가지에 달해 부품 한두개 바꾼다고 공급 부족을 해결하기 어렵다.
단순한 공급망도 효과를 봤다. 테슬라는 반도체 칩을 직접 설계하며, 외주를 줄 때도 최상위 단계의 반도체 생산 업체와 직접 거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테슬라는 자율주행 차량용 HW 4.0 칩 생산 계약을 삼성전자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일반 자동차 업체들은 일반적으로 두 단계를 더 거친다. 원재료(TSMC⋅삼성전자 등)→차량용 반도체 제조 업체(르네사스⋅NXP 등)→계열사 또는 협력업체→완성차 공장 순이다. 공급망의 어느 한 단계라도 삐끗하면 부품 조달에 차질이 빚어지는 구조다.
일부 전문가는 지리적 이점도 작용했다고 추정한다. 테슬라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와 중국 상하이 단 두 곳에서만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데, 중국 내 차량용 반도체 수급이 다른 지역보다는 원활했다는 것이다. 미 경제 매체 배런스는 테슬라가 올해 상반기 중국에서 생산한 물량 5만대를 수출했다는 점을 근거로 “중국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이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테슬라의 부품 조달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 때문에 부품 업체와 협상에서 유무형의 레버리지(지렛대)를 활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한국자동차연구원 이항구 연구위원은 “현 상황이 어떻든 다른 메이저 업체와 비교해 테슬라만 유독 원활한 공급을 한다는 점은 미스터리”라며 “높은 수요를 믿고 남들보다 비싸게 반도체를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애덤 조나스 수석분석가는 “테슬라가 전문성과 전기차 1위 업체라는 협상력을 앞세워 반도체 직접 생산이나 관계 단절을 암시하며 부품을 조달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일반 자동차 업체는 못 따라 해”
테슬라와 달리 일반 자동차 업체들은 반도체 부족 여파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GM은 3분기 미국 내에서 44만6997대를 팔아 전년 동기 대비 21만8195대(32.8%) 줄었다. 2009년 파산 사태 이후 분기 기준으로는 최소치다. GM은 올 초 반도체 공급난이 불거진 이후 생산 기간이 짧은 트럭과 SUV를 우선시하고 더 오래 걸리는 모델은 생산을 중단하는 등 탄력 생산을 시행했다. 일부 모델에서 자동 시동 온·오프 기능을 빼는 등 조치도 취했다. 하지만 아직 효과는 크지 않다.
도요타도 9월 판매량이 22% 줄어들었고, 10월에는 승용차와 트럭을 포함해 40% 감산하기로 했다. 도요타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공급 업체에 필요 이상의 칩을 비축하도록 해왔는데 이게 반도체 부족 사태 초기를 버티는데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공급난이 장기화하면서 8월 들어 다른 업체처럼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생산량을 하향 조정 중이다. 포드는 반도체 칩 장착이 필요한 공정만 빼고 차량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다수가 미완성품으로 대기 중이다. 현대차와 기아차도 차량 인도 기간이 계속 지연되면서 몇몇 기능을 빼고 출시하는 ‘마이너스 옵션’까지 내놨다. 현대차는 국내 반도체 업체와 손잡고 차량용 반도체 국산화도 추진 중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보지 못했다.
일반 업체들이 테슬라와 같은 대처를 할 순 없을까.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일반 자동차는 전기차와 달리 한 번에 설계를 바꾸기 어려운 구조이고, 산업 구조상 4단계 공급망을 단숨에 단순화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항구 연구위원은 “테슬라식 대처법은 현재 테슬라만 할 수 있는 고유의 장점”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 생산 차질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세라프 컨설팅 설립자 암브로스 콘로이는 “칩 부족 현상은 계속 악화하고 있으며 현 상태로 2023년을 맞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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