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테마섹(Temasek) 홀딩스’는 싱가포르의 대표적 국부(國富)펀드<키워드>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우리나라 한 해 예산과 맞먹는 4844억달러(약 565조원)의 자금을 굴리고 있다. 영국 스탠다드차타드, 에어비앤비, 알리바바의 주주이기도 하다. 이런 테마섹이 최근 국영 항공사 싱가포르항공에 89억달러(약 10조4000억원)를 투자했다. 신종 코로나 대유행(팬데믹)으로 자국 항공사가 대규모 적자 위기에 놓이자 ‘구조’에 나섰다. 테마섹은 싱가포르 창이 공항 근처에 코로나 방역을 위한 여행객 단기 체류 시설을 짓고, 조선사 셈코프마린(Sembcorp Marine)의 15억달러(약 1조7500억원) 규모 유상증자에 참여하기도 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큰손’인 국부펀드들이 요즘 달라진 행태를 보이고 있다. 고수익을 좇아 해외 신(新)산업과 개발도상국에 주로 투자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자국(自國) 투자를 급격히 늘리고 있다. 터키 국부펀드(TWF)는 지난해 터키은행과 보험사, 이동통신 사업자 ‘투르크셀(Turkcell)’ 등에 58억달러(약 6조8000억원)를 투자했다. 또 아일랜드 전략 투자 기금(ISIF)은 지난해 5월 이후 연말까지 모든 투자의 90%를 팬데믹 영향을 받은 기업에 할당했다. 금융 업계에선 “신종 코로나로 인한 경제 봉쇄 조치로 타격을 입은 자국 기업에 정부 대신 긴급 자금 수혈을 하는 차원에서 적극 투자에 나선 것”이란 말이 나온다. 사실상 ‘국가 개발은행’ 같은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전 세계 155개 국부펀드의 운용 규모는 헤지펀드(3조달러)의 3배인 9조1000억달러(약 1경547조원)에 달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윌 잭슨-무어 사모펀드·부동산·국부펀드 부문 리더는 “코로나 위기에서 자국 경제를 살려내려는 국부펀드들의 투자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팬데믹 따라 달라진 국부펀드들

팬데믹 이후 국부펀드들은 자국 산업에 투자하고 정부 재정 사업을 지원하는 등 내수 경기를 살리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국부펀드국제포럼(IFSWF)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국부펀드들이 자국 기업과 프로젝트에 신규 투자한 자금은 127억달러(약 14조원)에 달한다. 2019년(43억4000만달러)보다 3배가량 많다. 또 국내외 투자가 모두 가능한 국부펀드의 경우, 팬데믹 이후 자국 투자 비율이 전체의 44%로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팬데믹이 본격 시작된 지난해 3월 이전 3년 동안 국부펀드의 국내 투자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자료=글로벌SWF, 국부펀드국제포럼

올 들어서도 국부펀드는 상반기에만 40억3000만달러(약 4조7000억원)를 자국에 투자했다. 평소에는 전 세계 주식 및 채권, 부동산 등의 자산에 투자하며 수익률 제고(提高)에 힘써온 것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IFSWF의 빅토리아 바바리 전략 책임자는 “국부펀드들이 (코로나 사태 이후) 자신들의 가치를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국부(國富)의 증진’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재정의한 셈이다.

심지어 단순 투자자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정부의 정책 대응에 직접 관여하는 국부펀드도 많다. 노르웨이 중앙은행 투자관리부문(NBIM)이 대표적이다. NBIM은 운용 규모 1조3641억달러(약 1593조원)의 세계 최대 국부펀드로, 해외 자산에만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NBIM이 지난해 10월 정부에 전체 자산의 2.7%에 달하는 370억달러(약 44조원)를 긴급 지원해 세계 금융시장을 놀라게 했다. 칠레의 경제사회안정기금(ESSF)도 지난해 자국 정부에 41억달러(약 4조8000억원)를 인출해줬고, 올해는 60억달러(약 7조원) 이상을 추가로 인출해 줄 계획이다.

아일랜드 ISIF는 작년 5월 정부가 조성하는 팬데믹 안정화 및 회복 기금(PSRF)에 20억유로(약 2조7400억원)를 출자했다. 또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는 ‘스푸트니크’ 백신 개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2억달러(약 2310억원)를 투자했다. 국부펀드가 백신 개발 지원에 나서 직접적으로 코로나 위기에 대응한 것이다. RDIF는 이 백신에 대한 해외 판권을 독점적으로 갖는다. RDIF의 키릴 드미트리예프 CEO(최고경영자)는 “우리는 코로나와 싸우기 위해 가상의 제약 회사가 됐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나라에는 한국투자공사(KIC)가 있다. 현재 200조원 이상의 자금을 굴리는 세계적 국부펀드다. KIC는 그러나 테마섹이나 터키국부펀드, NBIM처럼 적극적인 국내 투자는 하지 않는다. 한국투자공사법에서 “국고(國庫)에서 위탁받은 자산을 외국에서 외화 표시 자산으로 운용하라”고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법으로 국내 투자를 막아 놓은 것이다. KIC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투자청(GIC)이나 홍콩금융관리국(HKMA) 등도 법적 규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자금을 해외 자산에 투자한다.

이는 국부펀드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부펀드국제포럼(IFSWF)의 분류 기준에 따르면 국부펀드들은 크게 ‘재정안정화형’ ‘저축형’ ‘경제개발형’ ‘하이브리드형’의 4가지로 구분된다. KIC는 이 중 저축형에 속한다. 저축형 국부펀드는 재정안정화형과 더불어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국부펀드다. 국가의 잉여 자금이나 외환 보유액을 잘 운용해 정부 재정을 강화하거나 미래 세대를 위한 저축을 하는 것이 목적으로, 국내 투자를 할 수 없도록 막아놓은 곳이 많다. 국부 펀드 업계의 고위 임원은 “(국내 투자를 제한하는 이유는) 국부펀드가 정부 입김에 휘둘려 잘못된 투자를 해 손실이 날 수 있고, 규모 자체가 워낙 커 자본 시장을 교란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내 투자, 모든 국부펀드로 확산

하지만 재정안정화·저축형 국부펀드는 상대적으로 소수다. IFSWF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순수 재정안정화·저축형 펀드는 각각 10개, 26개로, 150여 국부펀드 중 24%를 차지한다. 테마섹과 TWF, ISIF, RDIF 등은 ‘경제개발형’이다. 자국 내 경제 개발 프로젝트나 산업 육성을 위한 투자가 가능하다.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하이브리드형’이다. 국내외 자산에 모두 투자할 수 있거나, 재정안정화·저축형으로 분류되지만, 종종 개발형 펀드의 모습도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공투자펀드(PIF)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3월 주식시장이 폭락하자 미국과 유럽의 우량 기업에 100억달러(약 12조원) 이상을 투자해 큰 수익을 냈고, 동시에 자국 기업에 팬데믹 구호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의 양대 국부펀드 운용사인 아부다비투자청(ADIA)과 무바달라, 카타르투자청(QIA) 등도 저축형과 개발형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엔 이런 구분도 희미해지고 있다. 국내 투자가 막혀 있거나 집행에 어려움이 있는 국부펀드들이 자국 지원에 적극 나서면서다. 투자를 할 수 없으니 정부에 직접 돈을 대주는 방식이 등장했다. 저축·재정안정화형으로 구분되는 노르웨이 NBIM와 칠레 ESSF가 정부에 긴급 지원을 한 것이 일례다. 국부펀드가 정부 소유의 자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가입자가 낸 자금을 굴려 먼 미래에 돈을 내줘야 할 의무가 있는 연기금과는 재원 조달 방식과 ‘확정 채무’가 없다. 정부 입장에서는 좀 더 편하게 동원할 수 있는 셈이다. 스페인 IE대학 ‘변화 거버넌스 센터’의 하비에르 카파페 국부펀드 리서치부문 디렉터는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많은 국부펀드가 국가 예산을 지원해 복구 자금을 조달하거나 의료 시스템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압력에 휘둘린다” 우려 커져

팬데믹을 틈타 국부펀드들이 점차 ‘개발은행화(化)’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贊反)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찬성 진영에서는 “국부펀드는 정부가 주인이고, 국익을 위해 존재하는데 대형 위기를 극복하거나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개발형 국부펀드를 이상적 모델로 본다. 싱가포르 테마섹의 경우 싱가포르항공과 DBS은행, 싱가포르텔레콤 등 자국 기업의 성장과 국제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고, 캐나다 퀘벡주 연금운용사(CDPQ)는 소프트웨어·폐기물 처리·게임 산업 등에 집중 투자해 해당 분야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발형 펀드들은 수익률에도 민감하지 않다.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재무적 지표만으로 성과를 측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 국부펀드연구소(SWIF)에 따르면 개발형 펀드들의 기대 수익은 연평균 2~3%로, 일반적인 국부펀드들 평균 범주(연 3~10%)보다 낮다.

그러나 국부펀드를 ‘국고’의 일부로 여기는 이런 접근법에 우려를 표하는 전문가도 많다. ‘국부’를 국회 동의 등의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부 마음대로 집행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자본의 논리로 움직여야 하는 시장의 영역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부작용은 없는지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글로벌개발센터(CGDEV)의 앨런 겔브 선임연구원은 “국부펀드의 지배 구조는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격리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며 “투자 및 재무 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대규모 국내 투자에 대해선 별도의 보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국부펀드가 일부 권위주의 국가의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 강화에 기여한다는 우려와도 연결된다. 실제로 미국 국부펀드연구소(SWFI)에 따르면 작년 7월 기준 국부펀드 투명성 지수(10점 만점)에서 러시아(6점), 이란(5점), 오만(4점) 등이 저조한 점수를 받았다. 모두 국부펀드를 개발형으로 운용하는 나라들이다.

◇자국·단기 이익에 치중… 친환경 투자 부족

국부펀드의 ‘역할론’에 대한 논쟁이 불거지면서 국부펀드가 친환경 투자에 소홀한 점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나온다. 미래 세대를 위해 현재의 부(富)를 이전한다는 설립 배경을 가진 국부펀드가 자국 경제 활성화에만 몰두하고, 인류에 대재앙을 몰고 올 수 있는 지구온난화 문제에는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지적이다.

IFSWF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국부펀드 34곳 중 8곳만 포트폴리오의 10% 이상을 기후 관련 투자에 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뉴욕대 경제학과 베르나르도 보르톨로티 교수 분석에 따르면 글로벌 국부펀드 수익의 3분의 2는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에서 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자국의 단기적 이익에만 몰두한) 국부펀드들의 기후변화에 대한 단편적 대응은 미래 세대를 대신해 투자된 부(富)를 보호해야 하는 수탁자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정부가 소유 또는 관리하는 공공자금을 출자해 설립한 투자 기구다. 무역 흑자나 외환보유액 같은 외화 자산(주로 미국 달러)을 굴려 수익을 내기 위해 만든 경우가 많다. 다른 기관에 자산을 맡기거나 직접 운용해 수익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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