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중견 기업에서 일하는 이모(28)씨는 신종 코로나 백신 접종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직속 상사로부터 “아스트라제네카(AZ) 잔여 백신이라도 빨리 맞으라”는 재촉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근엔 동료한테서도 “빨리 백신을 맞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이씨는 “알레르기 체질이라 (부작용이 두려워) 백신을 좀 천천히 맞고 싶은 사정이 있다”면서 “내 나름대로 방역 수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데, 백신 때문에 자꾸 눈치를 주니 내 선택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 백신 접종을 둘러싼 일터 내 갈등이 커지고 있다. 기존 바이러스보다 감염력이 2배 이상 높은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국내에선 백신 접종 여부를 근로자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미국과 유럽에선 ‘사무실 정상화’를 위해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기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 백신 접종을 하지 않으면 사무실 출근을 허용하지 않거나, 심지어 직원을 해고하는 회사도 등장했다. 회사는 “안전한 근무 환경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 근로자는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당근’ 놓고 ‘채찍’ 든 기업들
최근까지 해외 기업들은 직원들의 백신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당근 정책’을 적극 도입했다. 미국 아마존은 신입 창고 직원이 백신 접종 증명서를 제출하면 100달러(약 11만5700원)의 보너스를 지급했고, 세계적 자산 운용사 중 한 곳인 뱅가드는 1000달러(약 115만7000원)를 백신 접종 대가로 내걸었다. 총 2만5000여 명을 고용하는 철강 회사 클리블랜드 클리프스는 직원 접종률 목표를 75%로 정하고, 오는 21일까지 이를 달성하면 전 직원에게 1500달러(약 173만5500원)를 상여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만약 접종률이 85%를 넘으면 상여금 액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현금 인센티브에도 백신 접종률이 지지부진하자, 미국 기업들은 ‘백신 의무화’라는 채찍을 꺼내 들었다. 미국 최대 육가공 업체 타이슨푸드는 오는 11월 1일까지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근로자는 해고하기로 했다. 타이슨푸드는 지난해 공장 근로자들이 줄줄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한동안 공장을 폐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월마트와 구글, 페이스북, 유나이티드항공 등도 근로자 전원 또는 일부에 대해 백신 접종 의무를 부과했다. 미국 방송사 CNN은 사무실과 현장 근로 직원에게 백신을 의무적으로 맞게 한 데 이어, 최근 백신 접종을 하지 않고 사무실에 출근한 직원 3명을 해고하기도 했다.
백신이 남아도는 미국이라 가능한 일이다. 한편으로 미국 내 심각한 고용난 때문에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로펌 코젠 오코너의 존 호 변호사는 NBC에 “기업들이 시간제 근로자 인력을 놓고 서로 경쟁하다 보니, 백신 접종 요구는 (백신 접종을 꺼리는 근로자의) 고용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이런 사정 때문에 월마트와 우버, 디즈니 등은 사무직 직원에게만 백신 접종 의무를 적용하고 있다.
◇”백신 강요 말라” 소송·파업도
기업의 백신 의무화는 일부 근로자 단체, 특히 노동조합의 반발로 이어지고 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남아있고, 고용주가 개인의 신체 결정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게 이들 주장이다. 조합원이 130만명에 달하는 미국 식품상업노동자연합(UFCW)은 타이슨푸드가 백신 접종 의무화 방침을 발표하자 즉각 반대 성명을 내놨다. UFCW는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현재 긴급 승인 중인 백신을 완전히 승인하기 전까지는 고용주의 백신 접종 의무화 방침을 지지하지 않겠다”며 “근로자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도록 타이슨푸드와 논의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직장 방침을 거부하고 소송에 나서는 경우도 나왔다. 미 텍사스주 휴스턴 감리교 병원 직원 117명은 병원이 백신 미(未)접종을 이유로 2주 정직 처분을 내리자 법원에 무효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그러나 “백신 접종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이를 기각했고, 해당 직원 전원이 해고당했다. 버지니아주에선 토드 지위키 조지메이슨대 로스쿨 교수가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대학은 개인의 건강 주권을 침해할 권리가 없으며, FDA가 정식으로 승인한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접종을 의무화하는 것은 위헌적”이라고 주장했다.
국가 차원에서 백신 접종을 의무화한 프랑스에선 파업도 벌어졌다. 프랑스 정부는 의료 종사자를 비롯해 사회 취약 계층과 접촉이 잦은 직종을 대상으로 9월 15일까지 백신 접종을 완료토록 했다. 그러자 프랑스 최대 소방관 노조인 FA SPP-PATS가 지난 9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프랑스 의료 종사자의 10%가 가입한 쉬드 보건노조 역시 지난 4일부터 한 달간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백신 접종에 반대하지 않지만 맞을지 말지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은 보장돼야 한다”며 “백신 접종 의무화는 평등과 자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한 위헌 행위”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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