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조원. 지난 13일 정부가 주최한 ‘K반도체 전략보고 대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위시한 국내 반도체 기업 153곳이 앞으로 10년간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금액이다. 국내 단일 산업 중 최대 규모 투자 계획으로, 올 한 해 국가 전체 예산(558조원)에 버금간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맏형인 삼성전자만 171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만큼 세계 반도체 산업이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고, 한국 반도체 산업에 닥친 도전도 크다는 의미다.

반도체는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적 가치를 기진 기술이다. 특히 전기차와 5G(5세대 이동통신), AI(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등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이 본격화하면서 고성능 반도체 기술은 더욱 중요해졌다. 이는 미국과 중국, 유럽 등 강대국 간의 ‘반도체 경쟁’ 심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 반도체 산업의 입지는 점점 더 위협받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열세와 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 약화, 미·중 간에 갈팡질팡하는 국가 정책 등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에 걱정을 안기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감 빈약한 시스템 반도체

반도체는 우리나라 총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주력 산업이다. 하지만 대부분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되어 있다. D램 시장에서 삼성의 점유율은 작년 기준 41.7%, SK하이닉스는 29.4%로 합산 점유율이 무려 71.1%다. 반면 이 산업의 주류인 시스템 반도체에선 한국 반도체의 존재감이 미미하다. 삼성전자도 이 분야에선 시장점유율(매출액 기준)이 2.2%, 세계 13위에 불과하다.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시스템 반도체의 비율은 56%에 달한다.

시스템 반도체의 대표격인 CPU(중앙처리장치)와 GPU(그래픽처리장치)는 인텔과 AMD, 엔비디아 등 미국 기업이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모바일 운영체제(OS)와 앱 구동에 쓰이는 모바일 반도체(AP)는 엔비디아에 인수된 영국 ARM과 미국 퀄컴이 장악하고 있다. 또 차량용 반도체는 네덜란드의 NXP(21%), 독일의 인피니온(19%), 일본의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15%) 등 유럽과 일본 기업의 독무대다. 삼성전자가 그나마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시장에서 2위지만, 1위 대만 TSMC와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분기 47.1%에서 올해 1분기 56.0%로 8.9%포인트 올랐지만,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19.1%에서 18.0%로 0.9%포인트 되레 떨어졌다.

◇무너져가는 메모리 ‘초격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경쟁력마저 도전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과거 선폭 3나노미터(nm·1nm는 10억분의 1m) 급의 초미세 반도체 공정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등, 해외 경쟁사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초격차’를 이룩했다.

하지만 최근 3위(23.5%)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이 삼성과의 격차를 빠르게 줄여오고 있다. 작년 11월 메모리 소자를 176층까지 쌓아 올리는 방식의 ’176단 낸드플래시'를 내놓은 데 이어, 올해 1월엔 최소 1나노미터급 선폭의 ‘1알파(α)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양산을 시작했다. 기존 D램 제품 대비 반도체 소자(素子)의 밀도를 40% 이상 끌어올린 기술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모두 제쳤다.

◇美·中 사이 갈림길에 선 한국

반도체는 국가와 진영 간 이해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산업이다.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의 반도체 기술 습득을 철저히 막고 방해한 것이 일례다. 이 때문에 1990년대까지 소련의 최신 전투기에 진공관이 쓰였을 정도다. 미국은 또 1980년대 히타치와 도시바, NEC 등이 세계 D램 반도체 산업을 장악하며 인텔과 모토롤라 등을 빈사(瀕死) 상태로 몰아넣자 강력한 대일 통상 압박에 나섰다. 미국 반도체 기업이 무너져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결국 1986년 “앞으로 10년간 공정가격 이하의 반도체를 미국에 수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미·일 반도체 협정(1986)’을 체결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의 D램 산업이 고속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이 됐다.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국제 정치적 갈등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중국이 반도체를 기반으로 5G(5세대 이동통신)와 AI(인공지능), 우주항공 기술에 두각을 보이자, 미국은 2018년부터 대중 무역제재를 통해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 더불어 세계 최대 반도체 제조국인 대만과 한국을 중국의 영향에서 떼놓으려 한다. 반도체 업계에선 “미국이 만약 자국과 한국의 안보적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1980년대 일본처럼 얼마든지 한국 반도체 산업을 고사시킬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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