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정보기술)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남모(31)씨는 수년간 보유했던 비트코인을 지난달 테더(USDT)라는 가상 화폐로 바꿨다. 요즘 유행하는 가상 화폐 기반 금융 상품, 이른바 ‘디파이(DeFi)’에 투자하기 위해서다. 남씨가 눈여겨본 것은 가상 화폐를 예치(예금)해 이자를 받는 상품이다. 그는 “연 이자가 10~20%에 달해 돈을 조금씩 넣어보기로 했다”면서 “요즘 가상 화폐 거래소에서 돈을 빼 디파이 투자를 시작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했다.

가상 화폐 투자 광풍이 디파이라는 새 영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디파이는 가상 화폐로 만든 일종의 ‘온라인 금융 상품’이다. ‘탈중앙화된 분산 금융 서비스(Decentralized Finance)’를 줄인 말이다. 이더리움이나 USDT 같은 가상 화폐로 투자하며, 블록체인 전문 업체나 개발자가 만든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으로 운영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디파이는 가상 화폐를 잘 아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가상 화폐 투자 열풍에 올라탄 20~30대의 투자가 급증하며 일반 투자자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일반 가상 화폐 투자보다 가격 등락 스트레스를 덜 받고, 수익률은 기존 금융 상품보다 높다는 이유다.

11일 기준 전 세계 디파이 시장에 투자(예치)된 자산의 총 가치는 853억9000만달러(약 95조800억원)에 달한다. 2020년 5월 9억 달러였던 것이 1년 만에 약 95배가 됐다. 미국의 가상 화폐 데이터 분석기업 메사리(Messari)는 “향후 20년 내에 디파이가 현존하는 금융기관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금융업계에선 그러나 “정부 감독을 받지 않는 사실상의 유사 수신 행위”라며 “다른 가상 화폐 투자처럼 투자 안전장치가 없어 위험성이 높다”고 비판한다.

◇가상 화폐 지갑만 있으면 거래 가능

디파이는 비트코인 이후 등장한 ‘2세대 블록체인’을 이용한다. 이더리움이 대표적 2세대 블록체인 가상 화폐다. 2세대 블록체인은 가상 화폐를 자동으로 거래할 수 있는 명령어(스크립트)를 입력해 실행할 수 있다. 이른바 ‘스마트 콘트랙트(smart contract)’라고 하는 기능이다. 디파이는 이 기능을 여러 개 연결해 금융 상품처럼 만들었다. 예금과 대출 같은 간단한 상품으로 시작, 최근에는 외환과 보험, 신탁 등 거의 모든 형태의 금융 서비스로 확장 중이다. 덕분에 송금과 결제가 고작이었던 가상 화폐의 이용 분야가 기존 금융 서비스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디파이를 실제 써 본 사람들은 “일종의 인터넷 금융 서비스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현재 이더리움과 테더, 다이(DAI) 등 가상 화폐별로 수천개의 디파이 상품이 나와 인터넷상에서 투자자를 모으고 있다. 정부 규제가 없어 가상 화폐를 담는 전자지갑만 있으면 전 세계 누구나 바로 투자할 수 있다. 이더리움의 경우 ‘메타마스크(Metamask)’ 같은 전자지갑을 인터넷 사이트나 모바일 앱 장터를 통해 내려받은 후, 회원 가입을 하고 가상 화폐를 충전하면 된다. 은행이나 증권사를 찾아가 계좌를 열고, 돈을 입금하는 것과 같다.

디파이는 인터넷상의 전문 중개 플랫폼을 통해 투자하는 것이 보통이다. 네이버나 구글 검색으로 이 사이트들에 찾아 들어가, 디파이 상품을 둘러보고, 자신의 전자지갑을 연결하면 가상 화폐 입금을 할 수 있다. 이 중 하나인 아베(Aave)의 경우,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가상 화폐를 담보로 다른 가상 화폐를 대출해주는 상품, USDT 같은 가상 화폐를 예치(예금)해 이자 수익을 받는 상품, 가지고 있는 가상 화폐를 비슷한 가치의 다른 가상 화폐로 바꿀 수 있는 스왑(swap) 상품 등이 나와 있다.

◇높은 수수료, 변동성 높은 이자율

디파이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상품은 가상 화폐 예치 상품이다. 주요 디파이 플랫폼의 수익률은 연 10~20%로 금융권 정기예금보다 높다. 10일 기준 아베의 USDT 코인 예치 상품의 연 최고 수익률은 복리 기준 28.7%에 달한다. ‘이자 농사(Yield Farming)’란 투자 기법이 수익률을 더 높여준다. 예치 투자자들은 디파이 플랫폼에서 발행한 자체 가상 화폐(거버넌스 코인)를 받는데, 이 코인이 가상 화폐 광풍을 타고 주요 가상 화폐 거래소에 상장되면서 가격이 급등, 추가 수익을 내게 해준다. 디파이 투자로 이자를 챙기고, 덤으로 코인까지 받아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 이자 농사가 디파이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느 가상 화폐 투자처럼 디파이도 ‘숨은 위험’이 만만치 않다. 우선 거래 수수료가 높다. ‘가스비(gas fee)’라고 부르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이용 수수료다. 금액 규모나 예치 기간과 상관없이 거래 건당 부과된다. 인기 가상 화폐인 이더리움을 이용해 디파이에 투자할 경우, 복잡한 가상 화폐 교환(스왑)·예치·출금 과정에서 수십만원씩 수수료가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국내 가상 화폐 투자사 임원은 “디파이 투자자가 급증하면서 이더리움 수수료도 크게 올랐다”면서 “1000만원 이상의 돈을 6개월 이상 예치하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지경이 됐다”고 했다.

한 디파이 플랫폼에서 거래되는 가상화폐 예금과 대출 상품. 코인 종류별로 각기 다른 이자율을 제공한다. / Aave

디파이의 연 이자율이 실시간으로 변동하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디파이 플랫폼 아베(aave.com) 기준 10일 28.7%에 달했던 테더(USDT) 코인의 예치 이자율은 다음 날 아침엔 전날의 절반 이하인 10.97%로 떨어져 시작했다. 이자율 결정 방식은 디파이 중개 플랫폼과 상품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그때그때 바뀌는 시장 상황을 따라가기 때문에 변동성이 크다. 일반 금융기관의 예금 상품처럼 1인당 5000만원 한도의 원금 보장도 없다. 어디까지나 블록체인의 자동 거래(스마트 콘트랙트) 기능에 의존해 굴러가므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거나 여러 가상 화폐 가격이 동반 급락하는 상황이 초래되면 원금 손실을 볼 가능성이 크다.

해킹과 사기 등 예치된 자산을 훔치는 사건·사고도 발생하고 있다. 디파이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블록체인 개발자의 실수로 보안 취약점이 생길 수 있다. 디파이 상품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올라간 뒤에는 수정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대로 설계가 되지 않은 디파이 상품은 해킹 공격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가상 화폐 전문 매체 코인긱은 “2020년 한 해에만 17개의 디파이 플랫폼에서 해킹 사고가 일어났으며, 피해 규모는 1억5400만달러(약 1725억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기존 금융 시스템 파괴할 수 있다”

디파이는 일반 투자자에겐 여전히 어려운 가상 화폐 금융 상품이다. 시장 자체도 이제 개화기라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기존 금융기관들은 디파이 시장의 확대를 보면서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난 3월 보고서에서 “디파이는 (기존 금융 시장에) 비트코인보다 더 파괴적(disruptive)”이라고 분석했다. 디파이는 돈을 입금받아 운용한 뒤 수익을 정산해 나눠주는 모든 역할을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맡아 하니, 금융기관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NFT(대체불가토큰)처럼 미술 작품 같은 실물 자산을 가상 화폐 기반의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해 거래하는 ‘가상자산' 시장의 확대 움직임과 맞물려 디파이는 더욱 위협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디파이 시장에선 이미 금과 은, 원자재, 달러, 각종 주가지수 등 실물 자산 가치를 가상 화폐(토큰)화해 추종하는 파생금융상품(합성 자산)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 신세틱스(Synthetix)가 대표적인 합성 자산 플랫폼이다. 11일 기준 총 예치 자산만 19억달러(약 2조1200억원)에 달한다. 미국 투자자문사 비앙코리서치의 짐 비앙코 CEO는 “차량 공유 기업이 택시 회사를, 전자상거래가 소매업을 파괴했다면, 디파이는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했다.

◇고객센터도, 책임자도 없는 디파이

디파이는 그러나 다른 가상 화폐 투자와 마찬가지로 정부 규제에 취약할 수 있다. 홍지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EU(유럽연합)가 발표한 디지털 자산 거래 및 발행에 대한 포괄적 규제(MiCA·Markets in Crypto-Assets)와 작년 말 발의된 미국의 스테이블 코인 규제법이 디파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문제 발생 시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다. 디파이엔 고객 서비스 센터도, 상품 책임자도 없다. 탈중앙은 곧 탈책임을 뜻한다. 디파이 상품을 개발한 사람이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이를 만들어 올리고 나면, 직접적인 운영은 모두 블록체인 네트워크 상에서 자동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파이 투자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와 그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사용자 개인이 지게 된다. 예치한 가상 화폐를 서버 오류나 해킹 또는 사기로 모두 잃더라도 보상해 줄 사람이 없다.

디파이가 또 다른 금융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디지털자산운용사 비브릭의 권용진 전략이사는 “디파이 파생 상품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재투자를 거듭하는 일이 이뤄지면서, 이 금융 상품들의 기초 자산(담보)이 무엇인지도 알기 힘든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디파이는 담보 가치가 하락하면 (스마트 콘트랙트에 의해) 자동 청산되므로, 가상 화폐 가격 급락 시 상품 간 연쇄 청산이 발생하면 금융 위기급의 큰 혼란을 낳을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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