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바이오사이언스의 A 과장은 지난달 19일 아침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며 허탈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전날 증시에 입성한 회사 주식을 팔려고 연차를 썼다. 지난해 입사한 A 과장은 싼값에 자사주를 살 기회를 놓쳤다. 그는 “그 전날엔 일부 직원들이 차익 실현을 한다며 우르르 퇴사해 단체 카톡방을 빠져나가더니, 다음 날엔 홀로 사무실을 지켰다”며 “상장 기념으로 구내식당에서 떡을 돌릴 만큼 회사 전체가 들뜬 분위기지만,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직원들은 소외감만 가득이다”라고 말했다.
올 들어 IT(정보 기술)와 게임, 바이오 기업 직원들이 높은 보수와 함께 자사주 잔치를 벌이며 축포를 터뜨리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 회사가 밀집한 경기도 판교엔 평균 급여액이 1년 전보다 20~30%씩 늘어난 회사들이 수두룩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카카오·네이버·엔씨소프트 등 주요 판교 대기업의 평균 급여액은 지난해 1억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모두가 축포를 터뜨리는 것은 아니다”라며 씁쓸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주변 동료나 동종 업계 사람들이 높은 보수와 자사주를 받는 것을 보며 이른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는 직원들도 있다. 한마디로 판교에도 극단적 양극화의 추세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깊어가는 판교 내 ‘연봉 양극화’
양극화는 연봉 인상 문제부터 시작됐다. 지난 3월 넥슨을 시작으로 스마일게이트, 게임빌, 크래프톤 등 주요 회사들이 앞다퉈 파격적인 연봉 인상안을 발표했다. 1000만원 안팎의 연봉 인상 혹은 수천만~수억원대의 스톡옵션 행사로 판교 월급쟁이들이 주변의 부러움을 한껏 샀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이야기일 뿐, ‘우리는 못 올려준다’는 회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회사마다 사정이 천차만별이라 업계 종사자들끼리 ‘연봉 인상 릴레이 불참 회사’ 리스트와 상세한 연봉 리스트를 공유하고 있다. 이 중 카카오게임즈의 경우 대표가 직접 직원들에게 “올해 추가 일괄 연봉 인상은 없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돌렸다고 한다. 이 회사의 한 직원은 “회사가 나름 규모도 크고 인지도도 있어 (연봉 인상) 기대를 했는데 실망했다”면서 “주변 회사 연봉이 1000만~2000만원씩 오르는 것을 보며 속이 상했다”고 했다.
바이오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SK바이오사이언스,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일부 대형 기업들을 제외하면 보수가 별로 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의 보수 격차가 더 벌어져 이직 생각만 더 커졌다는 말이 나온다. 인천 송도의 한 바이오 기업에서 일하는 과장급 직원은 “신약 파이프라인(출시 계획)에 희망이 안 보이면 2000만~3000만원씩 연봉을 더 주는 대기업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경영자들은 연봉 인상 행렬 때문에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토로한다. 판교와 강남 IT 기업들이 줄줄이 연봉 인상에 나서는 바람에 개발자 채용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한 부동산 스타트업 대표는 “직방이 갑자기 연봉 인상을 선언하는 바람에 (이 분야) 경력 개발자 몸값이 6000만원에서 1억으로 뛰었다”며 “아직 큰 액수의 투자를 받은 상태가 아니라 (대기업들처럼) 연봉을 한꺼번에 올려 주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개발자 몸값, 4~5년 더 오를 것”
개발자 전성시대라지만 모든 개발자가 ‘억대 연봉’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개발자도 분야에 따라 연봉 격차가 수천만원씩 벌어지고 있으며,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연봉이 가장 많이 뛴 부문 중 하나가 ‘백앤드(서버) 개발자’다. 앱이나 고객의 요청을 받아 데이터를 처리하는 회사 서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오류 없이 운용되도록 관리하는 업무다. 수요가 급증한 모바일 앱 서비스를 하는 회사라면 반드시 필요한 인재다. 하지만 경력을 쌓을 자리가 상대적으로 적고 오랜 업무 경험이 필요해 연봉이 급등했다. 빅데이터 DB(데이터베이스) 관리나 AI(인공지능)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기술 개발자도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LG전자의 경우 최대 5억원의 연봉을 걸고 AI 인재 영입에 나섰다.
반면 연차가 낮은 주니어급 개발자, 단순 코딩 기술을 갖춘 초보 개발자는 연봉 상승이 더디다. 속성으로 코딩을 배운 인력이 최근 급증했고, 점점 더 많은 회사들이 경력직 대신 신입을 훈련시켜 인력을 확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한 헤드헌팅사 임원은 “악보를 읽을 줄 안다고 연주 경험이 없는 사람을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마찬가지로 서버나 데이터 관련 프로그래밍 기술을 더 배운다고 해서 바로 (더 좋은 조건에) 이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어떤 경우든 가장 ‘찬밥’ 신세는 비(非)개발자들이다. NC소프트는 새 연봉 계획안에서 개발자 연봉을 비개발자보다 최소 300만원 더 주기로 했다. 넥슨과 네이버, 카카오 등 대다수 IT 대기업에서 개발자와 비개발자의 초임 격차는 약 500만~1000만원에 달한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최근 인력 공급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최소 4~5년은 개발자 몸값이 더 오를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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